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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쓰니 Oct 18. 2021

오늘 퇴사를 하고서야 그때의 네가 보이기 시작했어. ③

그 길에 마주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낯선 공기를 마시면 나를 둘러싼 것들도 함께 달라질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허구한 날 숙소에 박혀 있으면서 뭐가 달라지길 바랐는지, 욕심도 크지.

    가장 많이 본 것은 창문 한 칸짜리 풍경이요, 가장 많이 먹은 것은 숙소 5분 거리 복합쇼핑몰의 푸드코트 메뉴들이었다. 바깥 활동과 사람 만나기를 그렇게나 좋아하는 나인데 참 이상했다. 왠지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아무도 만나기가 싫더라고.


    그래도 이따금씩은 복합쇼핑몰 셔틀차량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그 길에 마주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푸트코트 요리사분께 손짓, 발짓 써가며 가장 맛있는 메뉴를 추천받거나 야시장 상인분께 넉살 좋게 웃으며 코끼리 바지를 흥정하는 것처럼.


    우연히 이루어졌던 대화들은 꽤나 즐거워서, 나를 아예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북적이는 재즈바에서 싱가포르 출신 여행객들과 ‘강남스타일’ 노래가 유행했던 이유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기사님과 서로의 나라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사람이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치앙마이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유명 관광지 동행을 구한다는 게시글에 댓글을 남겼다. 혹시 아직 자리 남아있으면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낯선 나라에서 처음으로 잡은 약속이었다.


    사원은 멋졌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모이기로 했던 네 명 중 한 명이 갑작스레 불참하는 바람에 허전할 법했지만, 우리는 어디서 마음이 맞았던 건지 사원 투어가 끝난 뒤에도 흩어지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중국식 군만두와 태국 맥주를 나눠먹으며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낯선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보다도 편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든 털어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퇴사한  옳은 결정이었을까요? 아직 현실을 몰라서, 어려서 실수한 걸까  걱정돼요.

    남은 20대를 후회 없이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들 어떻게 보냈거나 보내고 계세요?


    생각보다 깊어진 대화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하루치 추억으로 남겨뒀을 그들과 메신저 아이디를 주고받고, 아직 치앙마이에서의 일정이  남아있다는 S 언니와는 새로운 약속도 잡았다.  




    다음 날, 약속 시간을 확인하던 중 S 언니가 지인을 데리고 가도 되냐고 물었다. 지난밤을 되감기 해보니 새로운 사람을 또 만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오랜 회사 동료 사이. S 언니는 장기 휴가를 받아 한 달 살기를 하는 중이고, H 언니가 짧은 휴가 겸 들른 거라고 했다.

    그리 길지 않은 근무 끝에 퇴사를 하고 떠난 나와, 몇 배의 시간을 근속 중인 두 사람. 그리고 20대를 이제 절반 지나온 나랑은 달리 한창 30대를 채워가고 있는 그들. 나보다 몇 년만큼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전통시장과 강가의 골목들. 거리를 거닐고 이따금씩 사거나 먹는 게 전부인 일정이다 보니 조용히 놓여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침묵으로 두는 대신 지난밤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으로 채웠다.

    그들에게 엉켜 있던 고민들에 대한 질문을 많이 건넸다. 스스로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도 될지 그래서 조금 더 방황해도 괜찮은 건지, 나이가 들고 환경이 바뀌면서 관계도 변하는 게 당연한 건지 그렇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정리해야 하는 건지. 그런 것들.


    지금 생각해보면 선뜻 무어라 말하기엔 추상적인 주제들이라 나였어도 답을 망설였을 듯한데, 아무래도 그날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게 분명하다. 그 모든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S 언니와 H 언니 두 사람 다 시간을 들여 진심 어린 답변들을 건네주었으니 말이다.


    나도 그랬어요. 나도 아직 고민하는 문제예요. 딱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내가 20대일 때 했던 고민들은, 30대가 되고 보니 어떻게든 끝이 났던 것 같아요. 반드시 좋은 결말은 아니더라도 나름 대로.


    내가 현재 한가운데 놓여 있는 문제들을, 다른 사람의 경험과 시선을 통해 다시 마주 보게 되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일이 주는 안정감이나 회의감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언제 가장 삶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지, 익숙했던 사이가 변해가는 과정이 어땠는지… 그들의 기억을 함께 더듬어보고 그들의 생각을 함께 따라가 보면서 내 기억과 생각을 되짚어보게 되니까.


    그날, 나는 해답이나 정답 같은 걸 찾지는 못했다. 그저 그들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자려고 누운 침대 위에서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가 두고 온 모든 것들, 멈춰 놓은 모든 생각들을 한참 들여다봤다.





TMI 한 스푼

치앙마이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많이 본 건 사실 창문보단 넷플릭스였다. 이때가 구독료 뽕을 최대로 뽑았던 한 달이었다고 단언한다. 오리지널 프로그램인 '테라스 하우스' 시리즈를 미친 듯이 정주행했다. 그들이 싸우고 사랑하고 성장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날은 치앙마이가 아니라 테라스 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멈춰 있는 것 같아서 집에만 있는 걸 굉장히 못 견디는데, 이 시기만큼은 간접 경험으로 허전함을 꽉꽉 채웠다.


커버 이미지 출처: flat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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