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시간들이 많았다고 서술했듯, 사실 입사 후에도 한동안은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비교적 수월한 적응기를 보낸 덕이자 탓이었다. 퇴사 이유도 사람이나 일이 아닌 내 마음의 문제였으니, 퇴사 직전도 물론이고 입사 초반에는 더욱이 흔히 말하는 직장생활 스트레스와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묘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건 익숙해진 다음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사회로 나올 즈음 비슷한 시기에 흩어졌던 친구들이, 저마다의 적응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시 모인 우리의 대화에서 어딘가 변해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간호사로 입사한 A와 퇴근 시간이 맞아 오랜만에 전화를 하던 중이었다. 우리는 신입사원에게 바라는 것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며 한창 공감대를 형성하던 차였다. 환경은 달라도 신입은 다 똑같이 힘든 것 같다고 서로를 토닥이던 중 내가 집에 도착했는데,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들은 A가 부럽다는 말을 꺼냈다.
본인은 밤낮 바뀌어 가며 4 교대 근무를 해야 하지만, 나는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래, 니가 생활패턴 맞추느라 더 고생이긴 하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이 시원찮았다. A가 나보다 더 힘들다고 해서 내가 괜찮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A의 4 교대 근무 일정 앞에서 정시 출퇴근하는 내 생활은 다행스럽다는 이유로, 나의 힘듦 역시 A의 힘듦보단 가벼운 게 되어있었다.
같은 직장인이라는 점으로 위로와 분노를 공유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서로 다른 직장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누가 더 낫거나 힘든지를 경쟁하는 느낌. 우리는 언제나 같은 길 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각자의 길 위로 떨어져 있었구나. 힘이 되면서도 힘이 빠지는 대화였다.
처음엔 찝찝했고, 곱씹다 보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그처럼 꽁한 마음 곁을 맴돌다 보니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저 말 한마디였을 뿐인데 A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A가 그런 의도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닐 거야. 설령 맞다고 해도 A 역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사회에 나오면 친구 관계가 이렇게 다 변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삶이 달라질 테고,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받기 어려운 일들이 많아지겠지. 이래서 어른들이 평생에 진짜 친구 한 명 갖기도 어렵다고 하는 거구나.
그 뒤죽박죽 알고리즘이 당분간은 A와 회사 얘긴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괜한 섭섭함이나 괜한 고민 같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A와 뜸하게 연락하기 시작하고, 비슷한 이유로 다른 친구들과의 연락도 소원해진 채로 몇 달을 보냈다. 그 몇 달은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결국 퇴사를 결심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일이 생겼고, 마음이 성치 않았고, 일이 손에 안 잡혔고… 이랬고 저랬기 때문에. 쓰러지듯 잠들고 무기력하게 일어나는 날들이었다.
시시콜콜한 연락이 울리지 않는 전화기에 익숙해질 때쯤, 회사에는 퇴사 의사를 전달했다. 더 이상 출근을 안 하게 되면 뭘 해야 할까? 문득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마지막 출근일이 정해지고부터 오래 머물기 좋은 여행지를 검색해봤다. 광고가 적당히 섞인 정보성 글들의 연속. 그중 마침 저가항공사 특가 이벤트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있기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평소 관심도 없던 태국행 비행기를 덜컥 결제했다. 최종 목적지는 치앙마이였다.
퇴사를 하고 한국을 떠나도 자취방 월세는 내야 하겠지? 일탈치곤 대가가 꽤 비싸네.
그렇다고 해서 징글징글한 도시 한복판에 남아있을 거야? 아무렴, 거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긴 몰라도… 어쨌든 지금보단 해방감을 주겠지.
이유 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생각에 없던 지출과 막연한 생활도 감수할 만큼. 그래서 한 번 항공권 취소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선 뒤로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예약과 결제를 반복했다.
퇴사 겸 출국을 일주일 정도 남겨둔 시점엔 뜸해졌던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멀리 떠나 있는 동안 혹시라도 나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구구절절 읊지는 않았다. 언젠가의 M처럼, ‘그냥’이란 단어를 잔뜩 묻혀 퇴사를 앞두기까지의 몇 달을 설명했다. 그냥 그렇게 됐네. 그냥 좀 힘들어서. 그냥 일단은 좀 쉬다 오려고.
그렇게 마지막 출근날이 다가왔다.
시원섭섭한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짐 목록을 적기 시작했다. 주어진 용량은 24인치 캐리어 하나와 백팩 하나. 3박 4일용 수납공간에 한 달짜리 짐을 꾸리려니 쉽지가 않았다. 넣었다 뺐다를 수십 번쯤 했으려나. 짐 정리로 며칠을 보냈다.
더 이상 넣을 짐도 뺄 짐도 없어질 때쯤 출국날이 되었다. 급하게 짐을 마무리하다 캐리어 이음새를 찢어 먹어 바느질로 때우기도 하고, 항공편이 7시간이나 지연된 까닭에 밤새 공항에 묶여있기도 하고. 정신없이 꾸벅이며 비행시간을 보내다 사람들 틈에 휩쓸려 낯선 땅을 밟았다. 치앙마이였다.
좀비처럼 숙소에 들어와 짐을 푸는데 퇴사고 외국이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 몸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쫓기듯 결정했던 퇴사 전후로의 선택들에 대해 뒤늦은 의문이 밀려왔다.
나는 왜, 어쩌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이 고생을 해가면서.
답을 찾으려니 꺼내야 할 답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잘 도착했냐는 메시지들에 먼저 답해 줘야지. 근데 ‘잘’ 도착한 게 맞을까? 괜히 의미를 따지게 되고 머리만 아프다.
무엇이 필요해서 홀연히 떠나 온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잠이 필요한 건 확실했다. 옆으로 누워 답장을 쓰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남은 29일을 어떻게 보낼지, 한국에 두고 온 것들을 어떻게 다시 마주할지. 모든 생각을 멈춰 놓은 채로.
그렇게 치앙마이에서의 첫 날을 잠으로 다 써버렸다.
TMI 한 스푼
한 달 동안 살기 좋은 여행지라고 추천하기에 치앙마이로 떠난 거지, “치앙마이 한 달 살기”가 고유명사처럼 그 시기 한창 유행하던 여행 스타일이었다는 건 귀국이 다가올 쯤에야 알았다. 어쩐지 한국인이 많더라니. 유행에 편승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정말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음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