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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쓰니 Nov 17. 2021

자취하면 어른이 되나요? ②

점점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 솟구쳤다. 속았구나. 속은 게 분명해.

    흥청망청 써버린 뒤 남아있는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비는 40만 원 남짓. 엄마는 엄마 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마련한 돈을 모으고 모아 겨우 방값이 맞춰졌다. 이젠 서울에서 보기로 한 딱 한 개의 방이 최선이자 최고이길 바랄 뿐.


    4시간 남짓 걸려 서울로 향했다. 새벽부터 나와 휴게소도 몇 번 들러가면서 떠나는 긴 여정이었다. 하나뿐인 선택지가 시원찮을 만약의 경우와 오늘 안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점심 전에는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아빠는 평소보다 서둘러 운전했다.

    학기 중의 열기가 한풀 꺾인 방학 중 주말의 대학로. 주인집에 전화를 해 후문을 돌아서니 1학기 때 몇 번 지나 본 적 있는 길목에 이르렀다.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다소 어두운 복도, 허름한 내부. 그곳을 한 마디로 묘사하자면 겉만 리모델링한 구식 건물이랄까. 재학생 커뮤니티에서 소개하던 방은 복층 구조에 3층 이랬는데 열리는 문은 1층 안 쪽의 두 번째 방, 102호였다.

    3층도 복층도 아닌 그 방을 보고 있자니 서울로 출발하기 전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캡처해 둔 방 사진을 보여주며 서울은 이런 구조도 있다더라, 깨끗하고 넓어서 좋을 것 같다 하며 신나게 떠들었었는데 몇 시간 전의 일이 괜스레 낯설게 느껴졌다. 혹시 속은 걸까?


    그 생각에 멈칫해버린 몇 초의 시간. 내 눈빛을 읽으신 듯한 주인아주머니께서 입을 뗀다.


    계약 가능한 방이 여러 개 있어서 일단 보여주는 거란다. 그런데 내가 물어봤던 방은 사실 조건이 안 맞으니 지금 보여주는 방을 맞춰주겠다며, 3층보다 1층이 좋은 이유를 변명 같이 늘여 놓는다.


    맞다, 속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야 느끼는 사실. 그때는 속았다는 확신이 없었다.


    정말로 다른 방도 그냥 더 보여주는 줄 알았고, 정말로 맞춰 주기 쉽지 않은 조건을 어렵게 다른 방법으로라도 맞춰 주는 줄 알았고, 정말로 정말로 더 나은 방이라고 생각했다.

    과하게 믿었거나 억지로 믿고 싶었거나. 애초에 나를 그 방에 넣을 셈이었다는 의심은 물론이고 그때라도 주변 건물들과 중개사무소에 발품 팔아볼 생각도 전혀 못했다. 애써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모두 지쳐있었고, 주인아주머니께선 방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남은 혼을 쏙 빼갔다.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인집 소파에 앉아 계약서를 적고 있더라.




    완전히 그 집에 들어간 것은 그날로부터 2주 뒤였다. 우리 가족은 한 번 더 먼 길을 달렸다. 이번에는 온갖 짐을 욱여넣고 오느라 좀 더 고된 길이었다.


    자취에 대한 로망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서울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걸 보니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일주일에 한 번은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지. 친해진 동기들을 불러 소소한 술 모임도 해야지. 아 참, 고향 친구들이 놀러 오면 입을 잠옷도 몇 개 준비해 놔야지. 

    TV나 인터넷으로만 봤던 진짜 어른, 활발한 대학생의 삶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으로 도착까지 얼마 안 남은 그 시간이 애타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디까지나,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2주 전 그 건물 앞에 도착했는데 풍경이 달랐다. 무언가 드리워 있었다. 옆 건물에 담장 같은 벽이 하나 생긴 것이었다. 

    그 벽은 딱 1층 창문들을 가릴 만큼의 높이였는데, 경사진 길에 우뚝 서선 내 방 일조권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분명 우리 건물 앞에서 보면 1층인데, 옆 건물 문제의 벽 앞에서 보면 반지하가 되는 마법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방을 살펴보던 날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공사 소리가 시끄러워 창문을 열었더니 뭔가를 만드는 듯 보였던 옆 건물… 먼지가 날린다며 스르륵 창문을 닫던 주인아주머니의 손… 우리 건물엔 영향 없는 보수 공사일 뿐이라고, 2주 뒤엔 끝나 있을 거라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


    주인아주머니께서도 정말 몰랐을까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짐을 푸는데, 그만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그렇게 큰 바퀴벌레는 난생처음 봤다. 애당초 바퀴벌레인 줄도 몰랐다. 사람 한 명 눕기도 아담한 이곳에 어떻게 저렇게 큰 벌레가 나타나는 건지 납득이 안 갔다.

    주인집에 서둘러 알리니 손수 만든 바퀴벌레 약을 가져다주셨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익숙한 반응과 미리 준비되어 있던 듯한 약품 용기. 말로는 오래된 건물이라 아주 가아끔 밖에서 벌레가 들어오기도 한다고, 혹시나 해서 만들어뒀던 약을 나눠주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쯤 되니 점점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 솟구쳤다.

    속았구나. 속은 게 분명해. 


    하지만 이제 와서 깨달아봤자 어쩔 수 없는 노릇. 이미 계약서는 날인에 간인까지 해서 나눠 가졌고, 방에는 짐이 한가득 놓여있는데 이 마당에 어떡하겠냐고. 보증금까지 먼저 부친 이상 순순히 취소하고 돌려줄 거란 기대는 아예 안 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저… 본인도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은 한 귀로 흘리고, 살면서 불편한 게 생기면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말을 꾸역꾸역 위로 삼아 남은 짐을 푸는 수밖엔 없었다.





TMI 한 스푼

돌이켜보면 꼼꼼히 따져보거나 조율해보지 못하고 그 집에 덜컥 살게 된 게 분하긴 한데, 아마 여유롭게 집을 보러 갔어도 주인아주머니의 화려한 말솜씨에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그 집에서 나오기까지 몇 가지 문제가 더 있었지만 어떤 문제든 주인아주머니의 언변 앞에 무력해지곤 했다. 언제나 제대로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이 말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flat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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