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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쓰니 Oct 13. 2021

매년 반장 선거에 나갔다. ③

찰나의 기억들을 오늘을 살게 하는 힘으로 맞바꿀 수 있는 건…

    지난해의 치열했던 기억 덕분인지 6학년 반장 선거에 출마할 때는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뭐가 그렇게 비장했던 걸까. 올해가 마지막 초등학교 생활이란 사실이 꼭 내 평생 마지막으로 반장이 될 수 있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하긴. 6년 내내 도전해온 자리인 데다가 사실상 초·중·고 학창 시절 전체 중 절반에 다다른 시점이었으니. 열세 살 인생에서는 일리 있는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준비했던 연설 역시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인기 있던 만화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던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의 주제가를 개사해서 불렀더랬지.


    반장 선거를 할 거란 소식을 들은 날부터 집에만 오면 컴퓨터로 가사를 띄워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글자 수에 맞게 가사를 고치느라 노래를 몇 번이고 불렀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차마 랩 부분까지 소화할 자신은 없어서 공약을 설명하는 부분과 노래를 부르는 부분을 나누는 전략을 세웠다. 수십 번 연습한 덕분에 공약은 멋지게 말했는데, 수십 번 연습했음에도 노래는 시작하자마자 목소리가 떨리더라.


    어김없이 시작된 투표, 여느 때와 같이 불리기 시작한 여러 개의 이름들… 결국 그 순간이 다가왔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자의 이름을 확인한다.


    반장 □□□.

    처음으로 내 이름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어느 월요일 전교 조회시간, 뜻밖의 호명에 조회대로 올라가 봤던 때와는 비교가 안 됐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무엇인지 모를 감정들이 복잡하게 일렁거렸다. 교실 앞으로 다시 나가 울먹이며 입을 연다.


    얘들아, 나를 믿어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이제 곧 졸업하는데… 마지막 1년을 잊지 못할 시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할게.


    어렵게 얻어 낸 결과, 그 자리에서 보낸 1년은 좀 달랐었나?




    사실 대단히 특별하진 않았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줄곧 되려고만 노력했지 되어본 건 처음이었기에 오히려 서툴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 되짚어 보려니 굉장히 단편적으로 재생되는 장면들. 그 해의 기억도 ‘초등학교 시절’이란 제목으로 묶여 여느 해와 비슷하게 조각, 조각으로 떠오를 뿐이다.


    다만 그 해의 조각은 보통 그 제목 안에서도 가장 먼저 꺼내게 되는 것이고 딸려 오는 조각들도 꽤 많은 편이다.

    그렇게 연결된 조각들이 오랜 기간을 긴밀하게 아우르고 있다. 지금 이 이야기처럼.


    ‘초등학교’란 단어를 보곤 칠판 앞에서 무어라 열심히 외치고 있는 새 학기의 나를 떠올린다. 좀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을 때 5년간 이어졌던 낙선의 기억을 떠올리고, 마지막 해가 되어서야 당선되었던 그 순간의 울먹임을 떠올린다.


    그때처럼 조금 오래 걸리는 것뿐이야. 그때와 같이 다다르는 과정인 거야. 진심은 통하니까. 노력은 어떤 답이라도 가져다주기 마련이니까. 직접 겪어봤잖아.


    어떤 날은 이유 없는 열정에 갈증을 느껴서 찾기도 하고, 어떤 날은 묵묵한 용기가 필요해서 꺼내보기도 한다.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언제든 곱씹을 수 있고 얼마든 목적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정성스레 모아둔 조각들이니까. 찰나의 기억들을 오늘을 살게 하는 힘으로 맞바꿀 수 있는 건 내 것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와 같은, 혹은 그와는 사뭇 다른 조각들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나. 지나간 기억을 수시로 불러낸다. 잊지 않으려 수없이 되풀이하고 잊고 싶어도 놓지 못하여 다시 담아두면서, 그 서랍을 자꾸만 열었다가 닫았다가 한다.

    그러다 보면 일련의 서사, 일종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때가 있다. 똑순이에서 똑쓰니가 된 사연, 이미 완주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또 보는 이유, 자취와 알바로 깨우친 인생 노하우처럼. 분명 제각각이었는데 하나의 덩어리로 완성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중 웬만큼 내게 의미 깊고, 그 안에서도 어느 정도 완결된 것들을 엮어 기록해보려 한다.

    그 시절 홈쇼핑이니 노래니 별별 콘셉트의 연설을 준비했던 것처럼 어떤 취향이든 하나쯤은 들어맞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해를 궁금해하고 이번 해를 믿어주었던 친구들처럼 누군가의 마음에는 통할 거라 믿으면서.





TMI 한 스푼

중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반장에 대한 고집이 사라져서 부반장을 해보기도 했다. 사실상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급 임원 선거 자체에 잘 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대신 전교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중학교 땐 당선되고, 고등학교 땐 낙선. 이제 보니 감투 욕심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매년 반장 선거에 나갔다.> 닫음

커버 이미지 출처: flat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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