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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렙백수 윤준혁 Jul 08. 2019

도(道)란 무엇인가

#최진석 #함평학교 #노자의목소리로듣는도덕경 #2-1교시 #새말새몸짓

#만렙백수윤준혁

본 글은 새말 새몸짓을 위한 '함평학교'에서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 학습한 뒤 배운 것을 정리하기 위해 쓴 일종의 학습일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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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도덕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도(道)이다. 그리고 도덕경의 1장에선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노자는 도를 '무엇'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다짜고짜 이게 무슨 말일까? 쉽게 말하면 일단 도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도라는 말에 얽매이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도가도(道可道)에서 앞의 도는 노자 철학의 핵심인 그 도(道)이고 뒤의 가도(可道)라고 할 때의 도는 '말하다' 내지는 '정의 내리다'로 풀이해야 한다. 즉 '도를 이름지어 말한다면 그것은 상도(常道)가 아니게 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신이라고 이름 붙여 믿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름대로의 신을 생각하고 그것을 상상해 믿게 되지만 그것을 본래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각자 초상화의 형태로 그려보라고 한다면 같은 모습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한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도 없고 형상을 그려볼 수도 없다. 신에게 이름을 붙여 믿거나 그림으로 그려 추앙한다면 그것은 모사 물(Copy)을 믿는 것으로 절대적 신이 아닌 신의 모사물인 상대적 신을 우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도(常道)란 무엇일까? 노자는 만물의 근원이자 절대적인 진리를 가리켜 도(道)라고 했다. 우리는 이런 진리 중 항시적인 진리와 일시적인 진리를 구분해야 하는데 항시적인 진리를 아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지만 일시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은 고집이 세지기 마련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명제처럼 항시적인 명제는 깨달음을 주지만, '회식에 늦게 온 사람은 술을 3잔 이상 마셔야 해'와 같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일시적인 명제는 그 시공간을 벗어나면 진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유물혼성     선천지생

寂兮    寥兮

적혜    요혜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독립불개    주행이불태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가이위천하모   오불지기명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자지왈도  강위지  명왈대    

- <도덕경> 25장 중 일부 발췌


어떤 것이 혼돈스러운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천지보다 앞서 살고 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모양도 없어라,

홀로 서 있으며 달라지지 않는다. 마치지 않는 곳이 없어 운행하면서도 어그러지지 않으니,

이 세상의 어미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억지로 글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거기에 이름을 붙여 크다고 말할 뿐이다.



  도는 천지 만물이 나뉘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도 없다고 노자는 말한다. 또한 도는 절대적인 표현이 아니라 무어라 형언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도(道)라 이름 붙였을 뿐이고 굳이 설명하라고 하면 무한하게 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2장에서도 도에 대해 강조하는데 도는 영원하지만 이름이 없으며 통나무와 같이 작고 초라해 보여도 감히 이 세상에 신하로 삼을 자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통나무를 조각하면 비로소 이름이 있는 형체가 생기듯 도를 실행하면 만물이 탄생하고 비로소 이름이 생긴다고 했다.


  또한 <도덕경> 14장에서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릴 수 없으며, 잡아도 잡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감각인 오감으로는 이 도를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초음파나, 초저주파를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것처럼 도(道)는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이 감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대부분의 만물은 이 구분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단맛과 짠맛도 태초부터 단맛과 짠맛이 존재한 것이 아닌 우리가 구분을 했기 때문에 단맛과 짠맛이 존재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사람과 추한 사람 역시 태초부터 그러한 것이 아닌 우리가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정도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도는 이것을 넘어선 존재라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노자의 전언이다.



#만렙백수윤준혁

본 글은 새말 새몸짓을 위한 '함평학교'에서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 학습한 뒤 배운 것을 정리하기 위해 쓴 일종의 학습일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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