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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을 거닐다 Mar 28. 2020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실화라서 더 감동스러운, 무거운 주제이지만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


어제 <히든 피겨스>가 포털 실시간 검색에 올라왔다. 언젠가 봐야지 하고 찜해두었던 영화라 이유가 궁금해서 클릭을 했더니, <히든 피겨스>의 실존인물인 캐서린 존슨이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생각난 김에 주말에 영화를 봐야지 했다. 페이스북에 이 소식과 영화를 봐야겠다란 생각을 올렸더니, 페친들의 강추가 이어졌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추천하니, 더욱더 기대가 되었다.


NASA에서 일했던 3명의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의 실존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1960년대에 흑인과 여성이란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주인공이니, 어떤 스토리인지 예상이 될 것이다. 이들이 NASA에서 일하면서 받아야 했던 차별과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오늘 오전에 여유도 있겠다 해서 IPTV로 느긋하게 영화를 감상했다. 역시 기대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여러 상황과 주인공들의 주옥같은 대사는 보는 내내 마음을 묵직하게 울렸고, 중간중간 울컥울컥 하기도 했다. 더해서 흥미로운 스토리와 연출의 탄탄함, 그리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어우러지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미지



좋은 영화가 그렇듯 장면 하나하나마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내가 콕 집은 세 가지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1. "그게 그런 걸 어쩌겠어요." vs. "당연하다고 해서 그게 옳은 것은 아니란다."


주인공 3 총사 중 리더십이 뛰어난 도로시 본, 그녀는 흑인 여성들로 구성된 전산실에서 실상 관리감독 (supervisor) 일을 하면서도 그 직위로 승진하지 못한다. 여성이자 흑인은 관리감독직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NASA에 IBM 컴퓨터가 들어오자 선구안 있는 도로시 본은 컴퓨터에 대해 배워야겠다 생각하고, 시립 도서관에 아이들 손을 잡고 책을 빌리러 간다. 그런데 당시는 일터뿐 아니라 버스나 공공시설에서도 유색인종 구역이 따로 지정되어 있는 시대, 도서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흑인 구역에서는 원하는 책을 찾지 못해 백인 구역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한 백인 여성이 무서운 눈초리로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여기는 백인 구역이라고, 큰 소리 내기 전에 얼른 흑인 구역으로 가라고 말이다. 도로시는 흑인 구역에 찾는 책이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백인 여성이 하는 말이다. "그게 그런 걸 어쩌겠어요.(That's just the way it is.)" 세상이 그런 거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얘기다.  


이 대사는 영화에서 한 번 더 나온다. 천재 수학자인 캐서린은 우주선 발사와 관련된 계산 업무를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상황이 실시간으로 바뀌는 바람에 우주선 궤도를 계산하는 작업이 비효율적이 되자 브리핑 회의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상사인 스태포드에게 요청하지만, 여성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규정에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그게 그런 걸 어쩌겠어요."


이렇게 사회는 차별이나 억압을 원래 그런 거라며, 그냥 받아들이라고 한다. 소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또는 부당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 많은 사람들은 '어쩌겠어'라며 그냥 순응하고 만다. 이런 태도에 대해 도로시가 하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도로시는 도서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후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두 아들에게 가르친다.  
"당연하다고 해서 그게 옳은 것은 아니란다. (Just because it's the way doesn't make it right.)" 


2. "당신에게 악감정은 없어요."  vs. "알아요. 당신은 그렇다고 믿겠지요."


캐서린의 울분 섞인 항변으로 최고책임자인 해리슨이 상황을 직시하게 된다. 그는 도끼인지 뭔지를 가져다가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 팻말을 통쾌하게 깨 부순다. 그리고 말한다. "나사에서는 우리 모두 같은 색의 소변을 본다. (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


그리고 그 사이 캐서린도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하고, 나사 최초의 항공엔지니어를 꿈꿨던 메리도 청원을 통해 백인 남성들만 듣는 코스를 들을 수 있게 되고, 도로시도 포트란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 어리바리 백인 남성들이 해결하지 못한 IBM 기계를 작동시키고(이때의 통쾌함이란~^^), 전산실의 흑인 여성들에게도 프로그래밍을 가르친다.


흑인 여성들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우했던 여성 관리자 미첼은 그간 도로시의 승진 요구를 무시해 왔다. 자신은 왜 안되냐는 말에, 미첼은 자기도 모른다며 왜인지조차 상부에 물어보지 않았다고 말했던 터다. 조직과 사회가 당연시 여기던 관습에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는 전형적인 사회 순응자로 살아온 셈이었다.


이제는 같은 화장실을 쓰게 되어 화장실에서 만난 미첼이 도로시에게 말한다.

"당신에게 악감정은 없어요. (I have nothing against you.)"

그러자 도로시가 말한다.

"나도 알아요. 당신은 아마도 그렇다고 믿겠죠. (I know, you probably believe that.)"


도로시의 한방 먹이는 이 말에 미첼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나 포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대상에 대해 차별이나 혐오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이나 지역, 성별 등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는 만연해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진행된 연구가 암묵적(내재적) 태도에 관한 연구이고, 이 연구에 대표적으로 쓰인 방법이 내재적 연합 검사 (IAT; Implicit Association Test)이다. 이 검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암묵적 또는 무의식적 태도를 측정하기 위한 검사인데, 우리가 기존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인지적 연합에 대해서는 빠르게 반응하고,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연합에 대해서는 인지적 처리에 시간이 걸리므로 반응속도가 느려지는 원리를 사용한 검사이다. 예를 들면 백인 얼굴과 긍정적인 단어의 연합 또는 흑인 얼굴과 부정적인 단어의 연합에는 빠르게 반응하는 반면, 그 반대인 백인 얼굴과 부정적인 단어, 또는 흑인 얼굴과 긍정적인 단어의 연합에는 반응이 느려진다.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사람조차도 무의식적으로는 차별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가서 해보시길 https://implicit.harvard.edu/implicit/korea/)


사실 이런 무의식적인 태도는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교묘하게 스며든 것이기에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럴 때 활성화시켜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전두엽과 실천적 행동이다. 무의식적 태도는 생존과 안전 본능에 기반한 것이기에 우리 뇌의 원시적 부분이 발동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인간은 진화하면서 대뇌의 신피질과 고등 사고를 할 수 있는 전두엽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기에 본능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와 결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는 실천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미첼과 도로시의 이 대화 이후에 나온 장면이 이런 인간성을 보여준다. 미첼은 도로시를 찾아와 관리감독자(supervisor)로의 승진 통보서를 전달한다. 물론 도로시가 조직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중간 관리자인 미첼이 여전히 모른 척 승진에 대한 건의를 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혐오와 차별 철폐는 '난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차별하지 않아'라고 자기 위안을 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을지 모르는 무의식적 태도를 인정하고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행동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3.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이 영화 포스터의 카피 문구이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은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한국 포스터에만 쓰인 카피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감동을 포괄적으로 잘 대변한 멋진 문구이다.  


만약 캐서린이 흑인이고 여자란 이유로 NASA 우주선 프로젝트에 합류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데는 실패했을 것이다. 물론 다양성과 평등의 가치가 성과로 재단될 수도 없고, 재단되어서도 안 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다양성과 평등이 단지 로맨틱하고 이상적이고 도덕주의에 기반한 주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와 사회의 번영을 위해서도 다양성은 효용의 가치를 지닌다. 사회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과 배제를 하는 가운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자원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함께 가야 더 높이 갈 수 있다는 말은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조직에서도 새겨들여야 할 가치일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우리는 저 너머의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계산에 오류를 발견하고, 궤도를 정확히 계산해 낸 캐서린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저 너머를 봤어요. (I looked beyond)."



여러 가지 사건들로 어수선한 요즘, 어느 때보다 편견과 혐오 그리고 차별적 태도가 스멀스멀 파고들기 쉬운 때이다. 시의적절해서 더욱 의미가 있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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