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또 다른 아빠에게,
엄마는 주말 아침 일찍 약속이 있었다. 햇살이와 별님이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온 집을 난장판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둘이 함께 내지르는 고성과 괴성에 고막이 얼얼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차라리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쌀쌀했지만 녀석들의 끝없는 에너지라면 추위가 스며들기도 전에 워밍업이 끝날 거라는 계산이 섰다. 주말 아침 혼자 남겨진 아빠가 기댈 곳이라고는 미끄럼틀과 놀이기구뿐이었다.
늦가을의 이른 아침, 놀이터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햇살과 별님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위에 번쩍 아래 번쩍하며 놀이터를 전세 낸 듯 누볐다. 두터운 옷을 입고 미끄럼틀을 타니 둘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정전기가 파직거렸다. 매번 미끄럼틀을 탈 때마다 "앗! 따가워!", "깜짝이야!"를 외치면서도 꼬마 녀석들은 깔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몸에 정전기가 너무 쌓이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나는 아이들을 놀이터의 가장자리로 데려가 맨손으로 나무를 한 번씩 만지게 했다. 땅에 제대로 심어진 나무를 맨손으로 만지면 순간적으로 접지가 이루어지면서 몸의 정전기가 빠져나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아빠의 말에 갸우뚱하면서 어색하게 나무에 손을 갖다 댄 아이들은 재빨리 다시 놀이기구로 달려갔다. 난간을 만져도, 미끄럼틀을 타도 정전기가 오르지 않으니 신이 난 아이들은 "아빠! 진짜로 정전기가 안 나!"를 연신 외치며 이후로는 정전기가 다시 오를 때마다 나무를 만지러 뛰어다녔다. 정전기가 오르는 것도, 나무를 만져 정전기를 빼내는 것도 마냥 즐겁기만 한 녀석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한참을 그리 놀고 있는데 놀이터에 자매로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 나타났다. 한 아이는 햇살이와 비슷한 또래였고, 다른 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였다. 놀이터에서 또래 아이들끼리 만나면 암묵적인 룰이 있다. 함께 뛰어놀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 통성명을 하는 이 룰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듯했다. 사교성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햇살이가 친구 사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어느덧 두 아이는 한 몸처럼 붙어 다니며 놀이터를 누볐고, 아직 놀이를 잘 따라오지 못하는 별님이를 함께 챙겨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하던 큰 언니도 동생들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재밌는 놀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네 아이들은 함께 뛰어다니는 것은 물론 함께 손을 씻는다거나 챙겨 온 간식을 나누어먹는 등 본격적으로 친목을 다지기 시작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참 고마운 법이라서, 나 역시 가장 어린 별님이를 돌보며 새로운 친구들의 간식과 음료도 간단히 챙겨주게 되었다. 아이들은 둘러앉아 과자봉지를 비우고 목을 축인 다음 다시 뛰어놀기 시작했다. 신나게 미끄럼틀과 놀이기구를 타던 햇살이가, "아! 맞다!" 하며 나무로 뛰어가자 이를 본 별님이도 "아! 맞다!"를 따라 외치며 언니를 따라 달려갔다. 이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보던 자매들은 햇살이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나무를 만지고 온 거야?" 이에 햇살이가 답했다. "아, 우리 아빠가 알려준 건데 정전기가 너무 심하게 날 때는 나무를 만지면 정전기가 빠져나간대!", "와, 진짜? 나도 해볼래!" 이후로 아이들은 모두 미끄럼틀 한번, 나무 한번 터치를 번갈아 반복하며 놀기 시작했다.
어느덧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햇살이, 별님이와 함께 놀던 자매도 마침 엄마가 데리러 온 참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부모들은 서로 '놀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눈인사를 나눈 뒤 기분 좋은 피로감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깨끗이 목욕하고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햇살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빠, 아까 간식 먹을 때 그 언니들이 햇살이 보고 부럽다고 했어."
"뭐가 부럽대?"
"아빠가 계셔서 좋겠다고 했어."
햇살이의 대답을 듣고 잠시 흠칫했지만 요즘은 이혼 가정도 드물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햇살이의 말에 나는 가슴이 무너지고 말았다.
"언니들은 아빠가 하늘에 계시대."
놀다가도 가끔씩 내게 달려오는 햇살이와 별님이, 그리고 그 아빠인 나를 번갈아 흘깃흘깃 돌아보던 자매의 눈빛이 어딘가 조금 남다르게 느껴졌는데 그래서였을까..?
"... 그래서 햇살이는 뭐라고 했어?"
"슬프겠다..라고 했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주말 아침, 함께 침대를 뒹굴거리던 햇살이에게 별 생각없이 질문을 던졌다.
"햇살이는 소원이 뭐야?"
잠시 생각하던 햇살이는 굳이 내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엄마랑 아빠가 하늘나라 안 가는 거."
저 역시 두 딸아이의 아빠 입장이었기에, 햇살이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팬데믹과 녹록지 않은 현실들이 세상을 휩쓰는 지난 2년간, 늘 마음 한편에 이날의 마음과 이야기를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한쪽 눈에 하나씩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을 예쁜 딸아이들을 둔 아빠들로서 이 땅에서 만나 뵙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이 이야기가 쓰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 말씀만은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따님들은 정말로 밝고, 명랑하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비록 철이 일찍 들 수밖에 없었겠지만 첫째는 중심을 잘 잡고 묵묵히 어린 동생을 지켜봐 주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그늘은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이에 짓눌리거나 잠식되지 않고 밝게 웃을 줄 아는 예의 바른 아이였습니다. 한없이 밝고 천진한 둘째 역시 아빠의 빈자리를 의식하고 마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막내답게 한없는 사랑스러움과 발랄함으로 금방 기운을 차리곤 했습니다. 분명 그곳에서 단 한순간조차 놓치지 않고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는 따님들이 그날 저희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