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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Jan 31. 2023

늑대가 나타났다

거짓말쟁이들의 마을 - 10


덩치가 큰 야생 칠면조는 며칠씩 허기를 채워줄 훌륭한 사냥감이지만 그만큼 손질과 요리에도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숲에서라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무뿌리나 날카로운 돌조각을 이용해 칠면조를 손질했겠지만 평원 한가운데에서는 조리 도구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얀 바람의 날카로운 이빨을 이용할 수는 없을까 잠시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칠면조를 어떻게 손질할까 고민하는 나를 바라보는 늑대의 눈빛을 보고 금세 단념하고 말았다. 그의 눈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식사에 뜸을 들이는 것인지 내게 묻고 있었다.


배고픈 늑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칠면조 요리 준비를 서둘렀다. 튼튼한 나뭇가지 몇 개를 겹쳐 세운 다음 뚱뚱한 칠면조의 몸뚱이를 위에 얹었다. 이어 인근 초목들에서 구한 질긴 줄기들을 이용해 칠면조를 거꾸로 매달아 단단히 고정시킨 다음, 깃털과 잔털을 남김없이 손으로 뽑았다. 양 날개 가장 바깥쪽 단단한 깃털 부위는 도무지 맨손으로 뜯어낼 수가 없었다. 숲이나 산속이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날카로운 돌을 이용해 끊어 내었겠지만 평원에서는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날카로운 물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민 끝에 떠올린 것은 하얀 바람의 이빨이었다. 마침 피어오르기 시작한 모닥불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 탓인지 어느새 나는 칠면조의 한쪽 날개를 잡고 늑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물어뜯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칠면조와 나를 번갈아 보던 늑대는 날개의 끝부분을 입 앞으로 들이밀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깃털이 박혀있는 부분을 덥석 물었다. 나는 반대편에서 칠면조를 끌어안고 힘껏 잡아당겼고, 결국 양쪽 날개 모두 예상했던 부위보다 더 위쪽이 북 찢겨나갔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커다란 칠면조를 두고 늑대와 인간이 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얀 바람은 양쪽에서 뜯어낸 날개 부위를 식사로 삼았다. 쉴 새 없이 휘날리는 새하얀 눈발 속에서 그는 제법 긴 시간 식사를 즐겼다. 날개뿐 아니라 불을 이용해 제대로 조리하기 어려운 머리 부위, 발 아래쪽, 그리고 내장까지 모두 늑대의 차지였다. 나를 쳐다볼 겨를도 없는 것으로 보아 늑대는 자기가 차지한 부분들에 꽤나 만족한 듯했다.


길고 단단한 나뭇가지를 인근 하천에서 깨끗이 씻은 다음 몸통과 다리만 남은 거대한 칠면조에 관통시켰다. 하얀 바람이 사냥해 온 칠면조는 덩치가 특히나 컸다. 이 경우 고기를 작게 잘라 꼬치를 만들어 불 위에 올리는 방식이 가장 손쉽고 효율적이지만 살점을 도려낼 만큼 날카로운 도구가 없었다. 결국 모닥불 위에 꼬챙이를 얹어 천천히 돌려 익히는 수고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드넓은 평원 위에는 나무가 단 두 그루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찬을 즐기느라 정신없는 늑대와 벌거벗은 채 눈을 맞고 있는 칠면조를 뒤로 하고 둘 중 가깝게 보이는 나무에 다녀왔다. 톱이 없어 새총 모양의 가지는 구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곧고 튼튼한 가지 네 개를 구해 모닥불 양쪽에 둘씩 교차하여 지면에 단단히 박은 다음 나무 덩굴로 단단히 묶었다. 급조한 거치대 위에 드디어 칠면조가 걸린 꼬챙이 나무가 놓였다. 조리 준비를 모두 마치자 펑펑 내리던 눈발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눈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은 마침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하얀 바람은 식사를 마치고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어금니로 무언가를 열심히 씹으며 나와 모닥불, 그리고 칠면조 덩어리를 지켜보았다.


요리가 완성된 것은 해질 무렵이 되어서였다. 두터운 살집 안쪽의 덜 익은 부분은 불 위에 다시 올려놓고 바깥쪽의 잘 그을린 살점과 껍질을 손으로 뜯어내면서 이른 새벽부터 준비한 만찬을 시작했다. 어둑해질 무렵이 되자 늑대도 다시 허기를 느낀 것인지 곁에 다가와 앉았다. 잘 구워진 한쪽 다리를 찢어내어 하얀 바람에게 선물했다. 잠시 칠면조 다리를 내려다보던 늑대는 저녁 식사거리를 입에 물고는 모닥불 맞은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육식 야생동물에게 흔치 않은 하루 두 번째 식사를 시작했다.





숲에서는 야생 열매와 계곡의 작은 물고기 혹은 갑각류로 부족하나마 배를 채웠지만 평원에서의 먹거리 마련 문제는 차원이 달랐다. 얼마 전까지 숲과 평원의 경계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이자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다만 갑작스레 따라붙은 하얀 바람이라는 존재가 수시로 작은 야생동물들이나 새의 알 등을 사냥해 가져다 주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정체 모를 늑대들이 추격해오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원에서의 여정은 생존 측면에서 풍족하고 여유로운 편이었다. 평원 한가운데서 주어진 뜻밖의 전리품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다행히 숲에서 터득한 모닥불 요리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축 늘어진 털북숭이 칠면조를 음식으로 거듭나게 한 것만으로도 기뻤다.


잘 구워진 칠면조 다리 한쪽을 잡아들고 한 입 베어 물던 순간부터 벌어진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맛이 존재할 수 있구나 하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 기억은 난다.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땐 살점 하나 남지 않은 칠면조 뼈다귀 더미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덜 익어서 모닥불에 마저 익히던 고기까지 손에 쥔 채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로써 두 가지를 깨달았다.


칠면조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재료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나는 상상 이상으로 굶주려 있었다.





칠면조 손질과 조리로 인한 피로감, 포만감, 설원의 추위와 모닥불의 불길이 한 데 어우러졌다. 태어나 아마도 가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한다. 눈을 감은 바로 다음 순간 눈을 뜬 줄 알았을 정도로 어떤 뒤척임이나 꿈에도 시달리지 않은 채 그야말로 완벽한 숙면을 즐겼다.


포식 후의 단잠인 까닭에 기상하자마자 몸이 가뿐하지는 않았지만 눈을 뜨자 전체적으로 온몸에 기운이 가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은 그쳤는지, 오늘은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확인할 요량으로 지평선 어딘가에 보일 하얀 바람의 그림자를 찾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하얀 바람을 처음 만나던 순간처럼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어림잡아도 수 백을 훌쩍 넘는 칠면조들이 나와 이미 꺼진 모닥불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칠면조들은 하나같이 꼬리깃을 부채처럼 활짝 펼치고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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