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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Sep 09. 2023

늘 곁에 있어주어서,

늘 곁에 있어 줄 거라 믿었나 보다.


어떻게 잠든 건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침, 거실에서 눈을 떴다. 날이 더운 아침이면 녀석이 부스럭거리거나 더워서 쩝쩝거리는 소리에 에어컨 리모컨을 찾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곤 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제노가 없다.

대신 녀석의 침대에 좋아하는 간식 몇 점과 보자기에 싸인 네모난 상자가 놓여 있다. 더 생각하다가는 견디기 힘들 것 같아 산책을 나왔다. 빈손으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아 한 손에는 보리차 한 병을, 다른 한 손에는 제노의 묵직한 리드줄을 쥐고 무작정 나왔다.


늘 함께 걸었던 길을 걷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태풍이 오나 폭염이나 혹한에도 우리는 함께 걸었다. 밖에서밖에 배변하지 않는 제노와 나만의,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우리만의 혈률이자 일상이었다.


제노가 친했던 친구들을 만나 소식을 전하고, 제노가 좋아하던 스팟들에 잠시 들르고, 제노가 마지막으로 다리의 힘이 풀어져 주저앉아 소변을 지렸던 지점에 닿았다.

우리의 마지막 산책이 끝난 곳..


마지막 산책이 될 줄 알았더라면, 저기가 우리가 함께 걷는 마지막 지점이 될 줄 알았더라면, 그리고 네가 여느 아침들처럼 동생들 유치원 배웅을 함께 하고, 여기까지 계단을 오르기 위해, 아빠와 함께 산책 나와주기 위해 얼마나 아픔을 감내했는지를 상상하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산책로에 공원에 잔디밭에 벤치에 놀이터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지난 3년간, 글을 쓸 수 없었다. 육아로 바빠 제노에 관한 글을 쓸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어느 순간 내면에서 글이 흘러나오기를 멈추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억지로 글을 써보려 해도 나오지 않거나 억지가 묻어 나와 지우고 싶은 글들 뿐이었다.


그런데 제노가 떠나며 심장에, 마음에, 영혼에 구멍이 뻥 뚫렸다. 제노가 돌아오지 않는 한 이 공간을 메울 수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상실을 조금이나마 보전하고자, 살아남기 위해 견디기 위해 버티기 위해, 지난 몇 해 간 막혀 있었던 모든 사고와 언어가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든다.


제노가 보고 싶다.

지금은 이 말 외에는 아무것도 형언되지 않는다.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제37화의 제목은 “괜찮아, 제노”인 채, 2020년 3월부터 서랍에 덩그러니 저장되어 있다.


제노의 다음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제노와 산책하던 놀이터 어느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작성하는데, 아내에게 어디냐는 전화가 왔다. 제노가 너무 보고 싶다고 투정을 하는데 갑자기 오른쪽 겨드랑이 뒤쪽에 커다란 무언가가 앉는 느낌이 나더니 주사를 놓듯 따끔! 하는 것이다. 벤치 앞쪽에 죽은 말벌이 한 마리 엎드려 있었는데, 그 주위를 날아다니던 친구 말벌이 나를 공격한 모양이다. 황급히 떼어내자 커다란 말벌이 등 뒤에서 날아올랐다.


주저앉아있지 말고 움직이라는 뜻인 것 같아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쏘인 상처를 치료하고 나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 10년간 같은 길에서 산책을 하지만 말벌에 쏘인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아빠, 정신 차려!”

제노가 보낸 녀석일까


일단 벌에 쏘인 상처 치료를 하고 나서, 좀 더 성의 있게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제노 이야기를 이어나갈 셈이다. 또한 그동안 담아 온 수많은 이야기들도 함께.


우리의 마지막 가족 산책, 영원한 맏이 우리의 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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