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가전이 떠나가던 날
그녀가 아프다. 나의 그녀가 아프다.
똑 부러지고 스마트한 그녀는 규칙대로 목표를 똑바로 조준하고 그에 맞춰 행동한다. 가는 방향이 1도라도 틀어지면 재빨리 인지하고 제 자리로 돌아온다. ‘쉬엄쉬엄’, ‘융통성 있게’라는 단어는 관심 밖이고 맡은 일은 확실히 책임져야 직성이 풀린다. 휴직 한 번 없이 11년이 넘는 동안 일했고 두 번의 이사를 빼면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첫번째 이사로 하루, 두번째 이사는 짐을 맡기느라 일주일, 그 외에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괴로워도 활짝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아픔을 호소하는 순간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문을 열어보니 군데군데 눈물자국이 남아있다. 생기도 냉기도 하나도 없어서 이상한 마음에 온도를 재 보았더니 21도, 가장 낮은 곳이 11도다. 어제 오후부터 새로운 기계음이 들리더니 이 사단이 났다. 남편이 끙끙대며 앞으로 옮긴다. 설정을 초기화하고 코드를 뺐다가 다시 꼽아 보기도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다행인 것은 냉동실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이다. 응급처방으로 아이스팩을 열 개쯤 꺼내 냉장실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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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딸려 나온 어린이 칫솔과 돌돌 말린 먼지, 칫솔이 왜, 어떻게 들어간 걸까? 피식 웃음이 났다가 이내 번거로울 일상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지끈해온다. ‘왜 하필 지금이야, 이제 한여름 시작인데.’ 지금까지 누린 감사함 보다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치고 들어온다. 냉장실에는 어제 산 수박과 모처럼 만든 밑반찬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친정 엄마가 잔뜩 보내준 채소도 정리해야 하고, 어린이 원격수업도 챙기고 쓰던 글도 마무리해야 되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이라니. 한숨부터 나온다.
그러다 동병상련, 그녀에게 감정이 이입되면서 갑자기 서글퍼졌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는데 너를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당연해 보이는 일들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며 남편과 아이들에게 주지시키며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는데, 감사는커녕 한 순간에 번거로운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구나. 뜬금없이 부모님도 생각나고 내 신세도 장고씨와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코 끝이 찡해졌다.
“냉장고 바꿀 때가 된 건가? 백색가전 15년~20년 쓰는 거 아니야?”
“그건 옛날 이야기지. 요즘은 아마 8~9년일걸.”
남편과 함께 의기투합하고 검색하고 살펴보며 동지애를 다진다. 2010년형 우리집 냉장고의 적정 수명은 7년, 그 뒤에 출시된 제품은 9년이다. 사용자에 따라 다르지만 11년이 넘었으니 교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수리하는 것과 새로 사는 것, 선택지는 두 가지다. 수리 신청을 하니 가장 빠른 날이 맙소사, 8일이나 남았다. 조금 허탈하고 황당하다. 아니 이 더위에 냉장고가 고장 난 집이 이렇게 많은가, 일정이 밀린 걸까, 휴가일정이 겹쳤나, 알 길이 없다. 주문하려고 보니 여기도 일주일 걸린다. 아아, 사면초가로구나.
일단 신청을 해 놓고 제품검색에 들어간다. 김치냉장고도, 정수기도, 얼음이 나오는 것도, 고가의 하이브리드도 필요 없다. 딱 이정도, 또는 조금 작아도 되는데 원하는 것은 단종되어 찾기 어려워졌다. 요즘 선호하는 냉장고는 850리터에 문이 네 개 달린 것이라는 것, 컬러도 파스텔 톤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다. 용량이 작은 것은 많이 생산하지 않기에 용량대비 비싸다는 것도. 우여곡절 끝에 새 제품을 주문고 당장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 한번 더 아이스팩과 냉동 간식을 적당히 꺼내 냉장실로 옮긴다. 강제로 냉장실 온도를 낮추며 아이에게 말한다.
“아들, 지금 제일 먹고 싶은 거 골라. 맛있게 먹고 새 출발하자.”
그리고 삼일 뒤 기적처럼 담당기사가 왔다. 수명이 다 했다고, 부품 교체나 수리는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응급처치로 녹이 슨 열선에 가득 낀 얼음을 녹여주었다. 일주일에서 열흘 뒤에 같은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그렇지만 정확한 시점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강제로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 생겼다. 처음에 마주했던 당황스러운 마음은 조금씩 헤어짐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정리가 되어갔다.
그녀가 우리집에 온 날은 따뜻한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활짝 핀 목련 같이 하얗고 빛나던 그녀, 밤샘과 맞바꾼 내 얇은 월급봉투의 한 조각을 차곡차곡 모아 바꾼 내 인생의 첫 냉장고. 하얀 바탕에는 연핑크빛으로 목련같은 꽃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내 곁을 떠나갔다.
긴 시간의 애씀과 노고, 떠나는 날까지 인생에 몇 번 안되는 새출발의 기회까지 선물하고 떠난 그녀. 앞으로 주방 창가에 목련이 필 때마다, 봄이 지나 폭염이 시작될 때마다 그녀가 생각날 것 같다. 새로운 인연과의 10년도 따뜻한 봄날과 같기를. 당연하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기를.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꽃 같애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 날
온 세상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내 가슴 답답했는데
이젠 더 볼 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네
-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김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