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 같이 자려고 한 방에 누웠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이가 던진 말. 상상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너댓살 즈음에 처음 들었는데 다시 듣는 건 오랜만이다. 순간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 친구 이름이 뭐야?
레미!!
아하. 레미는 머릿속에 살아?
거기서 뭐해?
으응, 내가 잠이 들면 말이야.
레미가 나 대신 머릿속을 정리해 줘.
레미는 낮에 자거든. 가끔 낮에 깨기도 하고.
(레미? 도레미파 레미? 어머어머, 요즘 피아노 치는 걸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름도 '레미'라고 떠올린 걸까. 새로 온 피아노 선생님이 괜찮아 보이던데 그래서 그런가, 아니야 저번에 가기 싫다고 안간다고 했다가, 다시 30분만 하면 안 되냐고 했잖아. 하긴 저 나이 때 좋았다 싫었다 그런게 당연하지 뭐, 어른도 그런데.
아 참, 선생님이 그 OST 악보는 찾았을까? 검색해도 유료사이트만 뜨던데 이용하는 악보 사이트가 따로 있나, 물어볼까, 아니야 부담주는 것 같을까. 아이고 걱정도 팔자다, 뭐가 부담이야, 궁금하면 그냥 물어봐! 아무튼 좋아하는 노래가 있고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지 뭐야. 천재 음악가는 아니어도 즐길 줄 알았으면 좋겠네. 노래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고. 나도 배우고 싶다. 이참에 한 번 해볼까.
아니 콩쿨을 콩쿨이라고 하면 싫다고 했다가, 연주회라고 했더니 해보고 싶다고 했다가, 또 안 가고 싶다고 했다가 어떻게 할까. 지금 딱 이 순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래도 경험 삼아 한 번 하는 게 나은 걸까. 아니야, 저러다 또 그만한다고 하는 거 아닌지, 그럼 또 나만 피곤해질 텐데 밀어붙여야 하나, 마나. 조금 고민이네.
아 참, 바이올린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해보게 해, 말아. 기본 몇 년은 해야 소리라도 제대로 낼 텐데, 레슨비도 비싸던데 안된다고 할까, 실력 대신에 괜히 전기세 내러 다니는 건 아닐까, 아니야 어쩜 바이올린을 더 잘 다룰지도 모르잖아! 나중에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 없다고.)
아들이 던진 '레미'라는 한 단어에 1분 남짓한 순간에 별생각이 다 든다.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다고 하던데 그게 지금이네. 긴 순간은 결코 길지 않고, 짧은 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아들!
그런데 왜 이름이 '레미'야?
도.레.미.파. 할 때 그 레.미.야?!
아니!!!
레.미.콘. 할 때 레미!!
내 상상친구가 콘크리트처럼 튼튼하게 자랐으면 해서 지은 이름이야!
이름 진짜 잘 지었지? 푸하하.
아.......
형아,
레미 이름 진짜 웃기고 멋져!
듣던 둘째도 따라 웃는다.
오늘도 여전하다, 동.상.이.몽.
'도레미'에 '레미'인 줄 알았더니...... 하긴 레미콘이 더 직관적이긴 하군. 내 아들 음악 천재 아니냐며 김칫국부터 마시는 엄마라니 못 말린다 진짜. 아니지, 누가 감히 이걸 김칫국이래? 가능성은 닫는거 아니야, 열어두는 문이라고.
아무튼 오늘도 잘 때가 다 되어서야 '현실 자각 타임'을 가진다. 머릿속에서 일을 만드는 엄마와 오직 지금을 사는 아이들. 그런 격차는 접어두고 내일은 레고 레미콘이나 꺼내주어야겠다. 레미랑 잘 자 아들. 아니 레미야, 너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자자.
기왕이면 머리 밖으로 나와서 놀이방도 정리해주면 좋겠다. 온종일 박스를 자르고 붙이고 잔재가 아직도 온 방에 남아있거든. 우렁각시 말고 '우렁레미'처럼, 토이스토리에 우디처럼 깨어나 움직일 수는 없는거니. 엄마는 모르는 척 할테니, 제발.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