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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Jun 08. 2020

재잘대는 아이와의 시간은 행복

아이와 제주 보름살이 세 번째 날, 논짓물-새별오름

약 기운을 다 떨치지 못한 상태로 셋째 날이 시작되었다.

첫 밤에 곤히 잠들었던 곰이는 두 번째 밤에야 잠자리가 바뀐 걸 알았는지  많이 뒤척였다.

두 밤을 자고 나니 모자가 둘 다 감기와 피곤에 절어있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서울로 돌아갈 친구네는 짐을 꾸리고 나는 곰이 점심 도시락을 싸는 동안

부지런한 제주 친구가 숙소로 왔다.

어제가 제주에서 다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밤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단다.

하루가 더 있는 줄로만 알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헤어짐을 맞이한 친구는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자기 머리를 탓했다.

마지막 밤을 다 같이 즐겁게 보냈어도 똑같이 아쉬워했을 거면서...

다정도 병이다.

정이 많은 친구는 이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변함없이 이별에 서툴다.


논짓물


억새가 좋을 때라 새별오름에 들렀다 공항으로 갈 예정이라 하니

그것만으로는 아쉽다며 논짓물로 안내했다.

운전하느라 사진을 남기지 못했지만,

논짓물 들어가는 길목의 억새도 보기 좋았다.

사실 그맘때의 제주는  곳곳에 억새 물결을 품고 있어서,

돌아만 다니면 어디에서나 멋있는 억새밭을 만날 수 있었다.


피곤한 곰이는 차에서 내려놓자 짜증을 부리며 무조건 안으라고 버텼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등에 업어 포대기를 둘둘 말고 일행을 따라나섰다.

여름에 시원하게 해수욕, 아니 담수욕 하기 좋다는 논짓물은 가을이라 조금 썰렁했지만,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며 아이들은 또 잘 놀았다.



이를 가지기 전에 혼자 제주여행을 계획하면서 용천수가 나오는 곳이라는 논짓물 소개글을 본 적이 있다.

혼자서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몰다가 내키는 대로 구경하고, 아무데서나 먹고, 해질 때 카페에 들어가 커피나 마시던 초호화 여행이었다. 그때는 그런 자유로운 여행이 마지막일 줄 몰랐는데. ㅋ

당시에는 그저 내키는 대로 논짓물이 아닌 중엄리새물에 들렀었다.

이호테우 해변에서부터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공용화장실을 발견하고 우연히 멈춘 곳이다.

논짓물에 비하면 아주 소박하지만,

시원한 물소리와 거친 바람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매력 있는 곳이었다.


중엄리새물(2014년 늦가을)


10월 중순 제주의 낮은 아직 더웠다.

곰이가 해를 피하려고 더 등에 달라붙어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흘렀다.

바다는 햇빛을 하얗게 받아넘기며 하늘보다 더 밝게 빛났다.

멀리서 친구네 아이들은 뭘 하며 노는지,

구경꾼 모자는 용천수가 쏟아져 나오는 근처에 앉아 바다를 보며 멍을 때렸다.

날씨 참 좋다~ 하면서.


논짓물 해안


사계리 단비식당


현지인들에게 가성비 좋기로 입소문이 나서 점심시간에 늘 주차장이 꽉 차 있던 사계리 식당에 갔다.

홀 안쪽에 넓은 방이 있고, 사장님이 아이들을 반가워해 주셔서 아이들 여럿을 데리고 편하게 식사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제주에 있는 보름 동안 세 번 갔는데, 나중엔 곰이도 익숙한지 식당  방에 들어가자마자 내 집처럼 한쪽에 누워 놀아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이 가격에 이 구성이 가능한가 생각하게 되는 게장과 생선구이 정식이 정말 훌륭하다.

산방산 바로 아래 관광객들이 멈춰 사진을 많이 찍는 유채꽃밭 근처에 있다.

그렇게 많이 갔는데 사진 한 장이 없는 게 아쉽다.


우리는 느긋하게 게장과 생선을 초토화시키고

아이들이 예쁘다며 사장님이 건네주신 감귤로 디저트를 대신했다.

그리고 서울댁과 제주댁이 된 두 친구가 다시 언제가 될지 모를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새별오름
   


늦은 점심을 먹고 평화로를 탔더니 벌써 해가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는 큰 언덕쯤으로 보이던 새별오름도 가까이에서 보니 꽤 높았다.

억새가 은빛으로 일렁거리는 시기는 지났지만 사람들은 많았고,

주차장에 늘어선 푸드트럭들을 보니 유명세가 있는 곳이긴 하구나 싶었다.

친구네가 먼저 오름으로 출발하고,

나는 이동 중에 잠든 곰이를 차에서 좀 더 재우다 결국 들쳐업고 올랐다.


바람도 세고 햇빛도 강했다.

눈도 뜨기 싫어하는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블랭킷을 씌우고선

씩씩거리며 걸어 올라갔다.

처음부터 정상까지 오르겠다는 의지 따윈 없었다.

그냥 경치 구경할 만큼만 올라갔다 살살 내려오자.

아, 평소에 운동도 안 하는 아줌마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건만...

숨이 넘어간다 넘어가.


내려오는 사람, 올라가는 사람 가릴 것 없이 한 번씩들 쳐다볼 만한 광경이었다. ㅋ

그중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들의 관심을 온몸으로 받았다.

어떤 분은 좀 더 편하게 업으라며 포대기를 다시 매어 주시기도 했다.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나와 곰이는 오름의 3분의 2쯤 올라갔던 것 같다.

워낙 사람들이 많았어서 억새 흰 물결이 잘 나온 사진이 없네.


새별오름 중턱에서 내려다본 모습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내려오니 아이도 일어나고 곧 친구네도 돌아왔다.

정상까지 올라가 내려다보면 정말 볼 만하다는 친구 얼굴이 좋아 보였다.

곰이가 좀 더 크면 우리도 다시 한번 제대로 올라봐야지.

그때는 좀 한적했으면 좋겠는데, 내 욕심이겠지?!


이제 비행기를 타야 하는 친구네를 제시간에 공항에 내려놓을 차례다.

여지없이 차가 많은 평화로를 부지런히 달렸다.

친구는 피곤해 잠든 아이들을 흔들어 깨우고 가볍게 짐가방을 내려선

아쉽지만 갈 길이 먼 뒷모습으로 홀연히 웃으며 떠났다.


렌터카를 교체하고 내려오는 평화로는 정말 깜깜했다.

다들 내리고 말 없는 곰이만 남았는데

쉴 새 없이 이모, 이모를 외치며 내비게이션 누나 목소리를 눌러버리던

수다쟁이 조카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역시 존재감 최고다.


숙소에 돌아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며칠 만에 다시 단둘이 먹는 저녁이다.

평일에는 남편이 회사에서 삼시세끼를 다 해결하는 탓에

곰이와 하는 둘만의 식사는 너무나 익숙하다.

곰이는 책을 펼쳐 이거 읽어라 저거 읽어라 가리키고, 나는 먹이고 먹고 읽고.


친구도 먹고 먹이느라 분주하긴 매한가지였다.

이거 꼭 먹어야 되냐, 남겨도 되냐, 그만 먹고 과자 먹으면 안 되냐.

한 놈은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길고.

어떻게 보면 내가 더 평화로웠다.

그래도 어쩐지 좀 더 좋았던 건, 콩당콩당 대화가 오가는 식사 자리여서.

였던 것 같다.

언제쯤이면 곰이와 나는 마주 앉아 이야기하면서 식사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하려나...


하지만 신기한 건,

곰이가 말을 하지 못하지만 마치 대화를 한 것처럼

함께 얘기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거다.

이는 온몸으로 재잘거리며 떠든다.

곰이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언젠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겠지.

자기가 필요하면. ^^


갑자기 정적이 깃든 숙소에서,

더한 정적에 잠겼을 집에 있는 남편과 통화하며

셋째 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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