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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Feb 11. 2020

그냥 놀자, 지금 다 하지 않아도 좋아.

아이와 제주 보름살이 시작, 황우치 해변에서 모래놀이

제주도로 떠나기 전 일주일은 굉장히 바빴다.


여행 나나 아이의 컨디션을 장담할 없으니 2주 동안 빠지게 아이 치료를 미리 당겨서 채웠다. 식사를 거부하던 아이가 회복하는 중이라 보강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리가 됐는지 감기에 걸렸고 나까지 덩달아 몸살이 왔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밥 안 먹는 아이를 데리고 밤마다 산책하고, 주말마다 여행을 다니고, 그나마 있는 빈 시간에 보강을 한다고 돌아다녔으니 병이 날 만도 했다.

그리고 첫 3일을 함께 지낼 친구네 일정이 출발일 열흘 전 정도에 확정되어서, 떠나는 날 비행기 시간을 친구네와 맞춰 항공권을 급하게 다시 예약하고 렌터카도 기존 예약을 취소하고 카니발 3일과 나머지 기간 K3로 나누어 빌리기로 했다.

두 사람 옷과 비상약, 아이 기저귀, 장난감, 목욕용품, 이불만 넣어도 우체국 제일 큰 상자(5호) 하나로 모자라서, 어차피 두 상자 부칠 건데 각자 슬리퍼도 챙기고 아이 책 몇 권과 우비, 우산, 쌀과 주방 양념 몇 가지, 편한 크로스백과 각티슈까지 알차게 넣어서 택배를 부쳤다. 그리고 생수와 아이들 음료, 당장 먹을 채소나 달걀 같은 식료품은 렌터카와 같은 계열인 대형마트에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렌터카를 인수받을 때 같이 픽업하기로 했다.


내 딴에는 알차게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다른 엄마들과 비교하면 결코 알찬 사람이 아니었다.

숙소를 빌린 거니 생활필수품이야 당연히 있는 거지 챙길 생각도 안 했는데, 도착해서 둘러보니 샴푸, 비누, 세탁 세제도 없고 두루마리 휴지도 보름 동안 쓸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숙소 주인장 말씀으로는 처음에는 비치해 놨었는데 보름 이상 묵는 사람들은 으레 다 챙겨가지고 와 손도 대지 않기에 치웠단다. 띠옹~

그러고 보니 숙소 위치 잡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공과금 부담하는 것만 겨우 알았지 생필품은 어디까지 챙겨 가야 하는지를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 나름 꼼꼼녀인 줄 알았는데... 허당이었네.

주인장께서 두루마리 휴지를 한 아름 가져다주시며 더 필요한 것 있으면 얘기하라 하시는데 휴지만으로도 황송해서 감사하다 인사하고 바로 다음날 홈플러스에 갔다.


제주 도착


서울에 있는 친구와 그녀의 두 아이들이 김포에서 출발해 오는 동안 우리는 먼저 도착해 렌터카를 받아서 다시 공항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저녁에 먹을 고기만 사고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제주시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걸리다 보니 숙소에 도착했을 땐 벌써 오후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종일 이동만 해서 모두 지치고 배고픈 상태였다.

다시 30분을 달려 화순 친구 집으로 가는데 차창 밖 제주의 반가운 풍경이고 뭐고 다들 힘이 들어 아우성을 쳤다.

제주도에서 다 같이 보는 건 2년여 만이었는데, 밥 먹느라 바빠서 사진 한 장 찍을 생각을 못했다.


둘째 날 먼저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해놓은 친구가 새소리가 너무 커서 일찍 잠이 깼다고 다.

친구네가 돌아간 후 뒷마당 쪽 방에서 자 보니 정말 그랬다.

밥 먹고, 짐도 좀 풀고, 마당 구경도 하고 우리는 점심때쯤 산방산 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어제와 같은 길로 다시 가는데 전혀 다른 길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한라산이 보일 때마다 와, 좋다~ 했고

뒤에서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친구의 여섯 살 아들이 이모, 이모, 카니발 좋아요~ 했다. ^^


산방산이 내려다보는 황우치 해변에서 그냥 놀기


미리 검색해 둔 산방산 근처 카페에 갔다.

커피와 케이크의 가격은 어마 무시했지만 풍광이 워낙 좋았다.

가방을 던져두고 바닷가에 나가 한참을 놀았다.

그때는 화순방파제가 보여서 화순금모래해수욕장 근처인가 했는데,

황우치 해안 쪽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다음에 또 갈 일이 생긴다면 황우치 해변 방향으로 걸어봐야겠다.



아파트 단지 안의 모래놀이터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 곰이는,

해변 모래밭에 들어가자 좀 당황했다.

놀이터에서처럼 모래를 피해 빙 돌아나갈 수도 없고

멀어지는 엄마를 안 따라갈 수도 없어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느릿느릿 쫓아다녔다.

조개껍질을 찾는다며 모래를 만지고 노는 형아 누나를 구경이나 하다가,

나뭇가지를 주워 곰이가 좋아하는 숫자를 써주기도 하고

아이를 중심으로 크게 하트를 그려주었더니

자기도 커다란 나뭇가지를 주워서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다 털썩 주저앉아 모래를 만져본다.

밀가루도 질색하는 아이가 모래를 만지다니!

별 것도 아닌 일에 엄마는 신이 난다.



바닷물 바로 앞으로 나갔더니 곰이가 파도를 따라 팔짝거렸다.

형아를 따라 돌멩이를 주워 바닷물에 던져도 본다.

물론 곰이가 던지는 돌은 바닷물 구경도 못하고 발 바로 앞에 톡 떨어진다.

그래도 좋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돌을 주워 던지는 게 어딘가.

그때 또 한 번 생각했던 것 같다.

곰이한테 형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밖에서 한 시간 반 가량 아이들과 놀고 나니,

커피값 더 달라고 해도 줘야겠다 싶었다.

아, 정말 제주에 왔구나.

여행 출발 전부터 몸살기가 있었는데 기침이 심해졌고

곰이의 콧물도 심상치 않았다.

2박 3일 짧은 여행을 하는 친구네에게 너무나 미안했지만

다른 곳을 더 즐기지 못하고 숙소 근처 소아과로 향했다.

약을 받고 다 함께 장을 봐서 숙소에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은 거실에 엎드려 도미노 놀이를 하고,

나는 연신 콜록거리고,

여행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친구는 맥주 한 캔도 다 비우지 못했다.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친구는 바쁜 직장일과 두 아이 육아로 늘 분주하다.

최근 친정아버지가 사고로 크게 다치셔서 주말에 부산까지 오가는 강행군을 하는데, 기차 타고 혼자인 시간을 누리다니 호사가 따로 없다며 웃었다.


가끔 곰이의 미래를 생각할 때,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보다 아이 상황이 더 나쁘면 어떡하나 불안할 때,

그냥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올 때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고 운이 나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살다 보니,

모든 삶에는 다 저 나름의 짐이 지워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내 몫의 짐을 지고 가다 가끔,

친구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짐을 바라본다.

또한 무거워 보인다.

힘들어 보이네. 잠깐 같이 쉬고 가자.

서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그것 뿐이다.


남편 없이 떠나는 짧은 여행에도 두 아이를 다 놓지 못하는 미련퉁이 친구의 일상이 된 피로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리일 줄 알면서도 합류를 권한 거였는데,

나는 쉴 새 없이 기침만 한다.

아, 이런.


그래도 너무 좋다며 하루만 더 있고 싶다 소원하는 친구에게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오자, 다시 한번 제대로 모실게.

그래, 지금 다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에겐 다음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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