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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Jan 31. 2020

아이와 제주 보름살이

아이와 나를 위한 제주살이를 계획하며

아이와 제주살이를 마치면서 최대한 빨리 여행을 기록해 두자고 다짐했는데, 벌써 해를 넘겨버렸다.

일주일만 지나도 뭘 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곤 하는 요즘이라 이미 기억의 상당량이 스르르 없어져 버렸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해야지.


봄부터 계획했던 아이와의 제주살이는 원래 한달 살기였다.

숙소와 차량 비용의 기본 규모 때문에 한 달 이상은 머물러야 경제성이 좀 나오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치료  달치를 몽땅 빼버리거나 보강으로 돌리는 게 불가능했고, 어린이집 보육일수를 맞추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아이 아빠도 출퇴근을 하며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으로 한 달은 너무 길다며 한숨을 쉬었고, 특히 곰이가 여름 내내 밥을 먹지 않고 축 쳐져 컨디션이 엉망이어서 여행 자체가 힘들 상황이었다.


돈이 좀 아깝겠지만 보름 살기로 타협했다.

결과적으로는 보름으로 줄이기를 잘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와 둘이서 붙어 지내는 일이 역시 쉽지는 않았다.

돌아오기 전 마지막 주말을 함께 보내고 짐을 싸기 위해 남편이 제주도로 왔을 때,

굉장히 오랜만에 나는 남편이 반가웠다.

타지에서 생활을 한다는 건 역시 좀 적적한 일이었고, 아무리 얻다 쓰냐고 한숨짓게 하는 남편이라도 아직 어린아이를 돌보는 데에 손 하나를 보태는 걸로는 필요한 존재였다.


요즘은 아이를 데리고 다 해외로 나간다고들 하던데,

그래도 제주살이를 고려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계획 단계에서 결정했던 것들먼저 써보려고 한다.

실제로 나도 다른 분들의 여행후기 블로그를 많이 참고했기 때문에.


1. 시기

가을 억새 철로 정했다.

산굼부리

아이가 한적한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면 좋지 않을까 싶어 여름과 가을을 놓고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아이 성격상, 물놀이가 신나기보다는 뜨거운 햇빛이 더 싫을 가능성이 컸다.

아무래도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여름 성수기에는 숙소나 항공기 요금도 비싸고, 늘 관광객이 많은 제주이긴 하지만 휴가철 인파에 묻혀 아이랑 둘이 다니는 건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전 억새 철로 정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날짜가 미뤄져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가 됐다.

억새가 절정을 조금 지나고 있기도 했고, 돌아올 때 즈음에는 오후 바람이 꽤 차가워졌으니 10월 중순에서 말 사이가 가장 적당했을 것 같다.

그래도 제주도의 날씨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딱 하루 비가 조금 온 것 말고는 날씨가 항상 좋아서 다니는 내내 어느 곳에서도 한라산을 볼 수 있었고, 미세먼지도 이틀을 빼고는 모두 좋았다.

시기에 맞게 여행의 목표는 아이와 실컷 산책하기였는데, 아주 실컷은 아니라도 충분히 즐거울 만큼 했다.


2. 숙소

서귀포 시내 서홍동의 마당 있는 집으로 했다.

서귀포 숙소(자파리팜) 위치

아이들과 제주살이를 많이 한다는 곳을 중심으로 대강 알아보니 당시 가장 많이들 가는 곳은 한림, 애월 쪽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함덕, 세화, 서귀포 중문이나 법환동 쪽, 성산 등이다.

이른 봄 휴직을 시작하면서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혼자 쭉 둘러보며 집도 몇 군데 봐 두었다.

그때는 안전을 강조하는 남편 때문에 주로 빌라를 알아봤는데, 확실히 안전과 편의성 측면에서는 빌라가 제일 나았다.

아이가 수시로 바닷가에서 물놀이나 모래놀이만 하면서도 충분히 즐거워할 성격이라면 함덕-김녕-세화나 협재-금능 해변 근처가 좋다. 바다를 즐길 수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아이들이 갈 만한 관광지가 꽤 있다. 그래서 가성비 좋은 숙소도 많다. 나는 모래사장이 드넓고 물이 아주 얕은 표선 해수욕장이 마음에 들어 근처를 알아봤는데, 해변과 찻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걸어서 오갈 수 있는 빌라나 주택이 아주 조금 있었다.


한동안 애월이나 한림 쪽에 숙소를 잡을 생각으로 제주 서부를 많이 알아봤다.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을 박물관이나 놀이공원 등이 서쪽에 더 많이 있기도 했고,

제주도에 정착해 있는 친구의 집도 서쪽인 산방산 근처여서이다.

함께 출발해서 짧게 머물다 갈 친구네 가족을 데려다주고 남편을 픽업하러 가자면 공항이 가까운 게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있어 병원, 약국이 아쉬웠고

서쪽에 치우쳐 있으니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동쪽의 산굼부리나 사려니숲길 쪽은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그다음 고려했던 곳은 함덕과 남원, 표선이었다.

함덕과 표선은 해변이 마음에 들었고, 남원은 조용하고 따뜻한 마을 분위기가 좋았다.

혼자나 어른들끼리였다면 그중 한 곳으로 했을 텐데, 역시 아이랑 돌아다니기에 위치가 치우쳐 있고 관광지가 거의 야외라 비가 많은 제주도에서 차선책을 마련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제외했다.


생각을 바꿔 서귀포 시내 쪽을 보니 두 군데가 나왔다.

서귀포 매일올레시장과 홈플러스가 있는 동홍동 근방과 이마트와 월드컵경기장이 있는 법환동 근방.

동홍동 쪽 시내는 현지 주민들이 주로 사는 곳이고 복잡하기도 해서 마땅한 숙소가 별로 없었다.

법환동 쪽은 펜션과 농가주택이 법환포구 근처로 꽤 있었는데 숙소 근처 포구까지 조용히 산책할 수 있어 많이 알아봤지만 숙소들이 무언가 하나씩 부족한 느낌이었다.

집에서 외출하듯 지내고 싶은 마음이라 펜션은 썩 내키지 않았고, 농가주택은 안전을 이유로 남편이 반대했다.


결국 너무 시내라서 집 근처에서의 한적한 산책을 포기해야 했지만 대신 너무나 예쁜 마당을 품고 있는 집으로 정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바깥쪽 건물에 주인분께서 살고 계시니 1층 집을 반대하던 아이 아빠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주변에 홈플러스와 제법 큰 마트가 하나 있고, 서귀포의료원과 작은 병원들이 밀집해 있는 도심 근처였다.

올레시장도 가깝고, 가서 알았지만 유아체험학습을 진행하는 제주유아교육진흥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변의 인프라를 거의 다 활용했다.

소아과에 네 번은 갔고, 시장과 마트도 꽤 이용하고, 체험학습은 안 했지만 진흥원의 넓은 잔디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친구와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친구 가족들이 와서 잘 일이 꽤 있을 것 같아 무리를 해 조금 넓은 집을 잡았는데,

숙소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아침에는 새소리가 가득했고,

외출하러 나갈 때는 한라산을 보며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저녁 귀갓길 마당에 들어서면 집 위에 커다랗게 달이 떠 우리를 맞아주었다.

마당 빨랫줄에 이불도 널고, 공도 차보고, 아이랑 낙엽도 쓸어보았다.

곰이가 빗자루질을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달리 서둘러 밖에 나가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도 충분히 좋았던 건 마당 덕분이었던 것 같다.


아이와 그네를 타며. 새소리가 좋아서.


숙소 마당에서


3. 이동수단

청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 제주에서는 렌터카를 이용했다.

 

한달 살기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차를 탁송했겠지만, 보름은 탁송과 렌트의 비용 차이가 크지 않아 많이 고민했다.

차를 가지고 배편으로 가고 싶었지만 배 타러 가기까지가  문제였고, 탁송을 하면 차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바다를 건너 오가야 하다 보니 딱 이거다 할 이동수단이 없었다.


만약  제주살이를 다시 한다면 탁송을 할 것 같다.

짐을 최소화해 택배로 부쳐 보내고 받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고, 렌터카의 상태를 예측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하다.

제주도에 갈 때는 항상 조금 비싸더라도 대기업 렌터카를 이용했는데,

갈 때마다 거의 새 차를 받아 쾌적하게 사용한 기억만 떠올리고 별생각 없이 렌트했다가

십만 킬로 이상 고생해온 노후차를 열흘 넘게 끄느라고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장시간 렌트여서인지, 렌트비를 좀 아끼려고 늘 타던 중형 대신 준중형(가솔린)을 빌려서인지 노후차가 배정된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새삼 느꼈다.

역시 내 차가 최고다. ^^


4. 먹을거리

여행이라고는 해도 아이와 둘이다 보니 하루 한 끼 정도 외식하고 나머지는 숙소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렇다고 뭘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는 않았고, 근처 마트나 시장에서 3, 4일에 한 번 정도 장을 봐다가 밥을 해 먹었다.

나야 된장이나 김치찌개 끓여서 계란 프라이와 김만 있으면 해결이 됐는데, 문제는 까다로운 아드님의 식사였다. 현지인 친구의 추천을 받아 화순에 있는 한 정육점에서 떡갈비와 돈가스 등을 사다 굽고 곰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더해서 먹였다. 가끔 새우튀김도 해주고, 올레시장에서 게살 어묵 같은 음식을 포장해 와 반찬으로 주기도 했다.


아이도 생각보다 이것저것 꽤 잘 먹었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것 치고는 나도 크게 고생스럽지 않았다. 꼭 내가 다 만들어 먹여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해방되어 여기저기서 사다가 적당히 굽고 데워 먹여도 충분하다는 것 때문에, 여행은 엄마를 자유롭게 한다.


곰이는 특히 떡갈비와 게살 그라탱을 먹었다. 제주에서 돌아올 때 떡갈비를 좀 사 왔어야 했는데, 별생각 없이 택배로 주문하지 뭐 그랬다가 큰 코 다쳤다. 돌아와서 알아보니, 운송비용을 다 부담하고 사기에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더라.


가길 잘했다.

아이가 밥맛을 찾았다. 돌아와서도 꽤 오랜 시간 밥을 잘 먹었다.

그리고 좋은 휴식이 되었다.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어린이집과 치료 일정에 맞추느라 늘 마음이 바빠 아이를 다그치며 시작하던 하루 일상이 달라졌다.

자면 자는 대로, 놀면 노는 대로, 그냥 있으면 그런대로,

내가 느긋해졌다.

엄마가 느긋하니 아이는 더 활발해진 것 같다.

얌전하고 소심하고 조용한 아이가 갑자기 나보다 앞서서 뛰어가고, 모래밭에 낙서를 하고, 높은 곳에 올라갔다.

목소리도 굉장히 커져서 쟤가 내 아들인가 싶었다.

돌아와서도 노력하고 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준비하고, 아이에게는 느긋하자.

잘 안 되지만.


남편의 부재가 불편하고 조금 불안하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 시간 붙어 지내며 육아와 직장생활에 치이다 보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이 꽤 괜찮은 파트너였구나, 생각하게 됐다.

물론 그런 생각은 아주 금방 다시 흐려진다. 흐흐...


일상에 쏟는 에너지가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떠나야지.

아이와의 시간은 사실 늘 좋은 거지만, 엄마도 사람이니까.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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