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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Jun 16. 2020

힘들어도 괜찮아, 네가 웃으면.

아이와 제주 보름살이 네 번째 날, 본태박물관

전날 이동이 길어 피곤하기도 했고,

우민이 친구 윤이가 오후에 도착하기로 되어있는 날이기도 해서,

우리는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아점을 먹었다.

빨래를 돌리고, 청소도 간단히 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형아랑 누나가 가지고 놀던 튜브공도 차 보고,

뒷마당에 가서 귤나무 구경도 했다.

비가 있기에 낙엽을 좀 쓸었더니 곰이가 굉장히 좋아했다.

그 커다랗고 무거운 비를 영차영차 들어 옮겨 현관문 앞을 쓸겠다며 폼을 잡는 게 혼자 보기 아까웠다.

곰이가 진공청소기는 알아도 비는 몰랐겠구나.

태어나서부터 아파트 생활만 했으니 마당비는 더군다나 볼 일이 없었다.

문득 어린아이들은 전화기 아이콘을 봐도 그게 전화를 뜻하는 줄 모른다더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요즘은 유선 전화가 따로 없는 집도 많고, 대부분 스마트폰을 쓰니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알아온 세상과 곰이가 자라면서 알아갈 세상은 생각보다 많이 다르겠다.

세대차이가 있다는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우리가 제주도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둘째를 낳은 지 백일밖에 안 된 윤이 엄마는 덜컥 비행기표를 끊었다.

신생아를 맡겨놓고 2박 3일만이라도 윤이랑 놀러 다니고 싶다며.

우리 숙소에서 함께 지내자는데도 극구 사양을 하더니 드디어 온다고 연락이 왔다.

오후 두세 시쯤이면 제주에 오겠지 하고 평화로 쪽으로 움직였는데,

연락이 안 되는 게 연착인 듯했다.

안 되겠다. 늦었지만 우리끼리 놀자.

중간에 핸들을 꺾어 봄에 비가 많이 와 못 갔던 본태박물관으로 향했다.


본태박물관


이동하면서 잠든 곰이를 더 재우려고 그늘진 곳에 주차하고 시동을 껐다.

해는 기울고, 바람은 정말 좋았다.

제주에 와서 좋은 건 이것도 있다.

아이가 차에서 잠들면 바람 좋은 곳 어딘가에 차를 세워두고 나도 쉴 수 있다는 것.

복잡한 도시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러는 동안 윤이네가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는 소식이 왔다.

금방 해가 질 텐데, 렌터카를 처음 몰아보는 초보가 깜깜한 제주 길을 잘 찾아올 수 있으려나...

다음 날 들으니 윤이네는 저녁 여덟 시 반이 넘고서야 숙소에 도착했다고 한다.

딸 운전실력 덕분에 제주 와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있다는 윤이 외할머니의 말씀이 그저 농담만은 아니었다. ^^


삼십 분쯤 푹 자고 일어난 곰이와 함께 박물관에 들어갔다.

주차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단체관람객이 있는지 큰 버스가 두어 대 길 앞에 서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갈 땐 너무 늦었나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결과적으로 곰이와의 관람은 실패였다.

전시관 입출구와 이동경로에 계단이 많아 유모차를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서 거의 아이를 업고 다녔다.

에어컨을 틀기 애매한 계절의 마감이 가까워오는 시간,

햇살만 따갑게 비껴 들어오고 바람이 막힌 전시장 내부는 대부분 더웠다.


본태박물관 <무한 거울방 - 영혼의 반짝임> 전시관에서


주제별로 전시관을 드나들어야 하는 코스였다.

건물을 구경하며 바깥 길을 산책하듯 관람하라는 것 같다.

전시관이 5개였는데, 곰이는 처음 들어갔던 무한 거울방을 제외하곤 건물로 들어갈 때마다 울어재꼈다.

그나마 거울방은 아이가 좋아하는 반짝반짝 빛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그다음 전시가 하필 <피안으로 가는 길의 동반자 - 상여와 꼭두의 미학>이었다.

전시 자체의 분위기도 그렇고 목조 미술품을 보관하느라 그런지 특유의 냄새도 있어 곰이는 질색팔색을 했다.

엄마는 자꾸만 안으로 들어가고, 그게 싫은 아이는 입구 안팎을 오가며 발을 동동 굴렀다.

꼭두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별 수 없이 대강 둘러보고 나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제 무조건 안으라고 성화다.

포대기도 안 가져왔는데...

애를 데리고 이런 전시를 보는 엄마가 잘못이지 뭐.


본태박물관 <상여와 꼭두의 미학> 전시관 입구에서


아이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관람한 현대미술품 전시관은 채광이 과하게 좋았다.

덥긴 했지만 밝아서인지 아이는 좀 진정이 됐고,

엄마 체력의 한도 내에서 찬찬히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그래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커다란 샹들리에뿐이네.

뭘 많이 보긴 봤는데... 쩝


본태박물관 - 그때는 좋아 보여서 찍었다. 잠깐 아이가 걸어줘서 찍었을지도...
본태박물관 - 신기해서 찍었다. 트릭아트 같네. 올려도 되는 걸까...


요즘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미술관에 가도 안에 전시된 것보다 전시관 건물 그 자체가 작품인 경우가 많다.

본태박물관도 그랬다.

안산 경기도미술관에 갔을 때에도 주변 경관에 어울리게 잘 지었네, 했는데

건물 주위를 물로 두르는 게 요즘 트렌드인가... 싶을 만큼 이후에 비슷한 건축물을 몇 봤다.

뭐 나는 문외한이니까, 물이 있으면 다 비슷해 보일 뿐. ^^


하지만 곰이는 물이 있어 더 무서운지 사진을 찍으려고 먼발치에 가 있는 엄마에게 짜증을 부렸다.

이 건물의 운치가, 노을로 물드는 풍경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여기가 싫고 걷는 게 짜증 나 죽겠는데.

미안하다, 아들.


결국 나머지 전시관은 안에 제대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관람을 마무리했다.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바람이 차가워졌다.

차에 탄 곰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차창을 열고 경치 좋은 산록남로를 달리니 나도 뭐 좋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그래도 네가 웃으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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