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맹 Mar 12. 2021

장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길 2

아이의 초등 입학 준비 전, 외면하던 현실을 들여다보며.

발등에 떨어진 불로 나 혼자 호들갑


곰이는 올해 일곱 살이다.

12월생인 아이는 작년 겨울 만 5세가 되었고,

다시 한 달도 안 되어 우리 나이로 일곱 살이 되었다.

태어나서 여섯 번의 설을 보내는 동안 곰이는 떡국을 한 번도 먹지 않았지만,

꼬박꼬박 이르게 나이는 먹었다.

아직 네 살이냐 묻는 사람이 있을 만큼 체격도 작고 하는 짓도 어린데,

얘는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을까나.

시간의 흐름도 놀랍지만,

나는 이제 무섭다.

아직 말 한마디 못하는 아들의 이 부담스러운 나이가.


지난가을부터 내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그래 네가 그럴 때도 되었지." 했고,

다른 친구는 "괜찮다고 해 괜찮은 줄 알았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힘든 가정사를 겪고 있는 친구가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아."라고 해서

한동안 가볼 만한 정신과가 근처에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발화의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던 만 다섯 살이 결국 코 앞에 닥쳤는데,

그즈음 우리 곰이 같은 발달 성향을 보이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  년이 지나도록 무발화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수용 언어와 인지 수준, 상호작용 부분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현 언어만 전혀 발달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 특히 발달 퇴행이 오기 번도 발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채로 발달지연을 겪고 있는 아이들일수록 그렇다는 것이다.


더 몰릴 현실은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현타가 왔다.


곰이는 아직 스스로 우산을 들고 다니지 못한다.


어찌어찌 기저귀를 하지 않고 외출하게는 되었지만 아이는 스스로 배변을 해결하지 못했고,

자기 힘으로 옷을 입고 벗지도 못했으며,

떠먹여 주지 않으면 혼자서 먹지도 않았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밥도 심지어는 좋아하는 케이크도 먹으려고 하지 않아 여전히 어린이집에 싸 보내는 내 도시락 반찬이 모두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크레파스를 제대로 쥐지도 못하니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반복적인 촉각 자극에 열중하는 감각처리 문제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동안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수면에도 문제가 있었다.

늘 그러는 건 아니지만 한 달이면 일이주일 정도, 새벽 일찍 잠이 깨 놀다가 오전에 다시 잠이 드는 불규칙한 수면 리듬 때문에 어린이집 등원을 포기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지난 2년간 아이와 꼭 붙어 있으면서 도대체 뭘 한 것인가.

늘 힘에 부쳤고, 바빴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데 왜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을까.


아팠고,

화가 났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가도,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무기력함에 빠졌다.

모든 인간관계가 공허했다.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 다시 왔구나.

아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 욕심과 교만을 도려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또 다른 계단 앞에 섰구나.




내 오만함에 다시 묻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아이의 장애 진단을 받았기에 그 중한 정도에 대한 판단은 그다지 믿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3급이라는 등급이 경계성으로 갈 수 있는 정도라고만 생각했을 뿐,

곰이의 장애가 더 두드러져 1~2급의 더 중한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당연한 것처럼 배제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뛰어들어 애를 썼으니 분명 예후가 좋을거야. 라는 건 내 희망사항이었을 뿐 진리는 아닌데.

아이의 장애를 다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휴직하고 초반에 발달장애에 관한 여러 책을 찾아 읽으면서

아이를 일찍부터 특수학교에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남편의 강한 반대 의견에 부딪히고 아주 중증이 아니면 보내기도 워낙 어렵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일반학교 특수학급에 진학시키자 계획을 세웠다.

내 아이가 발달장애 범주 안에서는 그렇게 중증은 아니라고 -근거도 없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학과 동시에 시작될 아이의 고생이 눈에 선해 1년 유예를 고려하는 중이었는데,

그러자면 내 남은 휴직기간 내에 아이의 1학년 적응기간을 함께 해줄 수 없어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곧 일곱 살이 될 곰이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의문이 생겼다.

곰이가 과연 비장애 아이들 속에 섞여서 그럭저럭 학교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말 곰이가 특수학교에 들어가기 어려울까?

내 아들이, 장애 아이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중한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 한 문장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까지,

내 안에서는 폭우가 내리고 번개가 치고 불길이 솟았다가 다시 우박이 쏟아지는 여러 날씨가 오고 또 갔다.

그러나 질문을 하기가 어려웠지, 답은 쉽게 나왔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에서



나는 바람을 멈출 수 없다.

겁 많고 약한 아이에게 튜브를 쥐어주고, 파도가 아주 작아졌을 때 내보냈다가,

다시 파도가 커지면 돌아오라 손짓해줄 수 있을 뿐.

다른 아이들이 더 큰 파도를 즐긴다고 해서,

작은 파도로도 충분히 즐거운 아이를 더 깊은 곳으로 밀어넣을 필요는 없다.


남편에게 아이의 발달 수준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튜브에서 곰이 또래의 발달장애 아이들 영상을 찾아 보여주었다.

"곰이보다 작업이나 자조 수준이 더 높은 것 같지? 말도 조금 하고. 그런데 이 아이 특수학교에 입학했대."

아빠의 마음도 일렁이기 시작했다.


발화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의 의사소통 범위를 넓혀주는 거라는 데에서 나와 의견이 맞아

작년부터 곰이에게 그림카드를 이용하여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계시는 언어재활 선생님에게 물었다.

곰이를 특수학교에 보낼까 하는데, 경쟁이 세지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부모님만 마음먹으시면, 제가 보기엔 가능할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가 제3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조심스러울지 잘 안다.

그래도 부모에게는 필요하다.

이 뼈아픈 확인이.


주변의 특수학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여의치 않으면 용인으로 이사라도 해서 새로 생겼다는 특수학교에 보내리라 비장한 각오도 다지면서.

지역교육지원청으로, 다시 특수교육지원센터 담당자를 찾아 통화하고,

어느 학교에 지원할지, 아이의 장애 진단을 다시 받을지, 그러자면 어느 병원에 갈지 나는 다시 분주해졌다.

그래 바쁜 게 낫다.

그러면서 차츰, 가을부터 해를 넘기도록 가슴 속에서 끓던 기름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다시 여기에서, 길을 묻다.


복지관에 다니면서 장애 아이를 둔 엄마들을 여럿 보다 보니,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아이의 연령에 따라 약간의 경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아이의 남다름을 발견하고 닥치는 대로 치료에 몰두하는, 내가 속한 그룹의 엄마들은 눈물이 많다.

아이의 말, 문제행동, 보(교)육기관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눈물바람이 된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저마다 다 다르다.

"치료"라는 말이 주는 달콤함에 속아 '치료'될 거라는 희망의 끈을 아직 놓지 못한다.


가장 마음이 편해 보이는 엄마들은 대개 아이가 중고등학생인 경우이다.

아이의 장애를 잘 알고 있고, 학교 환경에 적응시키는 커다란 관문을 두 번이나 경험해본 베테랑들이다.

치료나 방과후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기 위해 쫓아다니기는 하지만 지난 시간과 비교하면 많이 편해졌다고들 이야기하며 여유 있는 표정을 짓는다.

엄마들의 관심사가 치료에서 벗어나 좀더 다양해지는 때인 것 같다.

부모회 활동, 진로 문제, 사춘기, 아이의 여가활동, 재취업까지 대화의 폭이 넓다.


그리고 성인 장애인의 엄마들에게서는 약간의 불안함이나 회한 같은 걸 느낀다.

늙어가는 엄마 없이 일상 유지가 잘 되지 않는 자식에 대한 걱정과, 자식의 장애로 인해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본인 인생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이, 특유의 농담 속에 섞여있다.

그분들 얼굴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사회복지와 장애 인식이 지금 같지도 않았던 시절을 맨몸으로 살아낸, 험난한 세월이 묻어 있다.


세상에 완성된 엄마라는 게 없는 것처럼

장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길이 그저 자식의 장애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자식을 키운다는 건 본래 힘들고 어려운 일이고,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공을 들여 키워도 아이가 소수자, 취약 계층속해 살아가게 될 거라알고 키운다는 건 힘들고 어렵다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나는 그 길 어딘가에서 아이를 보내고 멈추어야 한다.


모든 양육의 최종 목표는 자식의 독립이다.

내 양육의 최종 목표가 곰이를 한 인간으로서 독립시키는 것인지 묻는다.

사실 자신이 없다.

다시 묻는다.

불가능한 목표인지.

아니.

그래 그럼 못 먹어도 Go.








작가의 이전글 80년생 김지영의 친구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