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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맹 Apr 27. 2021

엄마가 애쓴다고 아이가 즐거운 건 아니지.

아이와의 제주 보름살이 일곱, 여덟 번째날 - 유리의 성, 하모 해수욕장

전날 많은 일정을 소화하고 밤늦게 잠든 우리는 느지막하게 일어나 근처 식당에서 고기국수와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다 같이 얼마 전 새로 개장했다는 뽀로로 테마파크에 가보기로 했다. - 2019년 가을의 일이다. -

그 날이 토요일이란 걸 잊었던 거다.

산록남로에서 안덕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서귀포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로 정체가 끝없이 이어졌다. 비행기 타고 온 김에 아이가 좋아하는 뽀로로의 제주 마을도 보여주고 싶은 부모가 어찌 나뿐일까.

평일에도 충분히 다닐 수 있는데 굳이 주말 인파에 섞여 관광지를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뽀로로를 포기하고 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이는 잘 놀아주는 형아 누나가 있으니 스케이트 보드를 가지고 나가 한 시간 넘게 놀았다.

그러고도 마당에서 멍멍이 윈디를 약 올리며 한참을 즐거워했다.

그렇게 방심하는 사이 아이의 모기 수난사가 시작되었다.

늦은 오후 따뜻한 안마당을 찾아 들어온 산모기에 물려 눈 옆이 퉁퉁 붓기 시작했고, 모기의 흔적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얼굴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덕분에 이 날 이후 모든 사진 속에서 아들은 울퉁불퉁한 얼굴로 웃게 됐다.


다음 날에도 우리는 느긋하게 숙소에서 오전을 즐겼다.

눈가가 심하게 부어올라 꼼짝도 안 하려던 아이는 마지못해 따라 나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슬쩍 공을 찼다.

잘 뛰어놀지 않는 아이에게도 마당 있는 집은 좋구나, 한다. 정작 그런 집으로 이사 갈 용기는 없는데.



숙소 마당에서 - 곰이가 공을 차는 건 지금도 보기 드문 일이다.


유리의 성


습관처럼 도시락을 싸가지고 나갔다.

아이 컨디션이 썩 좋지 않으니 오늘은 정말 천천히 놀자.

산록남로를 오래 달려 평화로 저 편에 있는 유리의 성에 갔다.

큰 기대 없이 아이랑 산책이나 조금 하고 나오자는 생각이었다.


전시물 곳곳에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리로 만든 거라 생각하면서 보니 와 대단하네 감탄이 됐지만

곰이가 볼 때는 그냥 반짝반짝하는 조형물일 뿐이다.

볼거리 많은 곳에 있을 때 늘 그런 것처럼 아이의 눈은 초점이 흐려졌다.

그래도 밝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소리가 나서인지 곰이는 생각보다 잘 돌아다녔다.


제주 유리의 성 실내 전시관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어린이박물관 안을 돌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 공간에서 무언가 분위기가 다른 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을 곰이는 몹시 두려워했다.

아주 어릴 때에는 유모차에 몸을 기대 앉아 그저 무심했는데,

스스로 걸음을 옮겨 이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는 공포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두 돌 즈음 시작된 발작적인 공간 거부는 다섯 돌 즈음, 일곱 살이 가까워서야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더러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오랫동안 전시물을 여러 각도로 관찰하기도 하고,

아쿠리아움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오리나 상어가 떠다니는 수족관 속을 한참 바라보기도 한다.

여느 아이들에게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곰이에게는 비약적인 성장의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모습은 '더러 자기 마음에 드는 게 있을 때' 나올 뿐,

대부분의 장소에서 아이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거나 심하게 흔들린다.


관람코스를 따라 밖으로 나와서 "마법의 숲"이라는 곶자왈 갤러리로 들어갔다.

주차장에서부터 실내 전시관을 돌아본 것만으로 이미 아이의 체력은 거의 소진되었을 게 뻔한데,

포대기도 없이 숲길을 제대로 걷고 나올 수 있을까.

잠깐 망설여졌지만 에라 모르겠다, 간다.

뒤늦게 나온 햇빛이 따가웠지만 늦은 오후의 곶자왈 숲 속 바람은 곰이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수줍게 웃던 아이는 산책이 길어지자 안아라 업어라 더러 칭얼대기는 했어도

종종 멈추어 엄마의 셔터질을 참아주면서 무사히 숲을 돌아 나왔다.

아마 다시 가보면 굉장히 짧은 코스였을 것 같은데,

우리는 그 길을 40분 동안 걸었다.

물론 산책의 마무리는 어부바다.


제주 유리의 성


제주 유리의 성 - 마법의 숲


숲길 산책을 마치고 나니

엄마는 지쳤지만 아들의 컨디션은 한결 나아졌고,

남은 실외 전시공간을 기분 좋게 돌아다녔다.

북도 신나게 치고,

엄마를 따라 종종 뛰기도 했다.


아이의 표정이 풀리는 걸 보니 나도 마음이 스르르 놓였다.

마법의 숲이 맞기는 맞네.




송악산과 하모 해수욕장 사이 해변 어딘가


그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아진 아이와 그대로 숙소에 들어가는 게 아쉬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아이들과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쉬고 있단다.

좋았어. 오늘은 야외에서 저녁식사다.


도착하니 모래사장에 해먹까지 설치해두고 친구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구워 먹는 삼겹살,

그냥 익히기만 해도 꿀맛이 따로 없다.

마음 내킬 때 집안 살림 몇 가지를 텐트와 함께 챙겨 나와 집 근처 바닷가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게 일상적인 주말 저녁 중 하나라니.

아이들을 마음 편히 자연 속에서 키우기 위해 제주에 온 친구네 부부는 이미 목적을 초과 달성한 듯하다.


텐트 앞 조그만 돗자리에 둘러앉아 바람을 맞으며 저녁을 먹었다.

아이는 준비해 온 밥을 다 먹고, 다시 나가서 누나와 파도 피하기 놀이를 했다.

나는 사흘째 하는 일 없이 앉아 아이 노는 모습을 보며 진짜 휴가를 즐겼다.

처음 누려보는 호강에 좀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무 데나 드러누워 다른 아이들한테 밟힐까 봐 쫓아다니면서 일으켜 세우거나,

혼자 감각추구에 빠져있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죄책감을 느끼면서 다른 어른과 대화를 나누는 것 말고

다른 안은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른 일행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그런데 저렇게 놀기도 하네.

대가족이었다면 곰이의 일상이 조금 다르긴 했겠구나.





금세 해가 졌다.

바다 저 편으로 해가 떨어지는 걸 구경하다가,

새까맣게 어두워진 바닷가에 친구네 가족을 남겨두고 우리는 숙소로 출발했다.

이제 어두운 산록남로에도 익숙해졌는지 운전이 좀 편하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어디 갈까 아들.


유리의 성에서 - 아이가 좋아하는 엄지척을 발견하고 한참을 가리킨다. 비싸도 사줄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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