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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워킹맘 May 24. 2022

전철 개찰구에 회사 아이디카드를

21년 차 직장인 해방 일지

"삐삐~~"


요란한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여지없이 왼손에 아이디카드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도 오른손보다 왼손이 빨랐다. 교통카드를 꼭 쥐고 있던 오른손은 그제야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개찰구 문을 열어준다. 종종걸음을 내닫는 사람들로 퇴근 무렵 흔한 풍경이 펼쳐지는 일산역 1번 출구. 나는 직장인에서 엄마로 변신하는 그 길목에서 회사 아이디카드를 들이밀고 말았다.


'어머, 나 왜 이러지, 치매가 왔나! 미쳤나 봐'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그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몰려드는 창피함에 개찰구를 빠져나오기 급급했다. 이 사건에 대해 조금씩 생각해 보게 된 건 같은 일이 네다섯 번 반복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날도 개찰구로 올라가는 계단을 딛으며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교통카드를 꼭 쥐고 있었지만 "삐삐~"하는 우렁찬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나의 뇌는 어쩌다 아이디카드와 한 몸이 되어버린 것일까.   


월급의 노예

안정적인 수입에 만족하는 사람들

도전을 두려워하는 족속

가늘고 길게 버티려는 자


'회사에 오래 다니는 직장인'을 생각하면 흔히들 떠올리게 되는 표현들이다. 아이디카드 사건이 있은 후로 '나의 뇌가 왜 이렇게 고착화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월급의 노예'와 연관 짓게 되었다. 사실 나의 뇌뿐만 아니라 나의 심장, 나의 온몸이 회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의 시작부터 꼬이는 날이 있다. 은행을 가야 해서 FT 출근하게 된 화요일. 그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오전 6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은행이 9시에 여니까 8시 반까지 회사일 좀 하다가 나가야겠다.'


회사 노트북을 여는 순간

'아.. 맞다. VPN 기간이 어제 만료되었는데, 연장을 안 해 버렸네. 일하긴 글러 먹었군'


출근 기상 시간에 맞춰 일어나 씻고 앉아는 있지만 이 일도 저 일도 못하고 있는 초조한 나를 발견한다. 최근의 나는 늘 이런 식이다. 찰나의 여유 시간이 주어질 때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만 앞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되곤 했다. 읽고 싶었던 책을 몇 장 넘기다 말고 뜬금없이 노트북을 켜서 쓰고 싶은 글의 목차를 적어 내리기도 한다. 그러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책장 구석 먼지 쌓 다이어리를 꺼내 휑하게 빈 주간 계획 채우기도 한다. 엄마가 곁에서 나를 지켜봤다면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한소리 하셨을 텐데.


시작부터 꼬인 그날, 오전 2시간을 날리고 은행 9시 오픈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8시 45분 은행 앞에 도착했는데, 코로나로 영업시간 변경이란다. 9시 30분까지 내 앞에는 또 40분이라는 찰나의 시간이 놓였졌다.  2천 원짜리 아이스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2 블록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평일 대낮의 거리를 다닐 때 나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러다 핸드폰 진동이 울리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회사에서 나를 찾는 전화일까 봐. '공황장애' 초기 증상이 이렇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나에게 평일 대낮의 햇살과 주말 대낮의 햇살은 너무나 다르다. 평일 시간의 70%를 회사에 메어 있는 나의 사지는 평일의 햇살에 알레르기 반응이 생 주말의 햇살과 구분하는 능력을 갖게 돼버렸다. 


평일 낮의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싶다.

찰나의 해방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 나는 영원한 해방을 원한다. 만약 영원히 해방된다면, 평일 낮의 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주어지게 된다면 내 삶은 변화가 생길까? 더 이상 개찰구에 아이디카드를 대지 않을 방법은 찾은 것 같다. 아이디카드를 잘 포장해서 깊숙한 곳에 숨겨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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