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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Nov 18. 2020

세 번째 인공수정하던 날 #2

클럽 팔찌 아니고 신원 확인용 팔찌 

남편은 나보다 먼저 병원에 가 있었다. 정액을 약물로 처리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최대한 일찍 가야 했다. 초음파로 배란 상태를 확인한 후 시술 시간을 정하는데, 이때 남편의 일이 늦어지면 최적의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의사들은 한두 시간쯤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지만, 시술을 받는 입장에서는 혹여나 난자와 정자가 제시간에 만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 이 시간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타이밍이 안 맞으면 안 되지. 그래서인지 배란 직전 맞는 난포 터지는 주사 관련 글은 난임 카페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질문이다.


8시 30분쯤 병원에서 남편을 만났다. 다행히 남편의 결과가 좋아 시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4개의 난포가 잘 자랐고 이제 막 배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둘 다 준비 완료다. 지하에 있는 시술실로 내려가 본인 확인을 하고 클럽 팔찌 같은 신원확인용 팔찌를 팔목에 두른 채 얌전히 기다렸다. 우리처럼 밤잠을 설쳤을 여러 부부들 사이에 앉아 간호사가 이름을 호명할 때까지 조용히 대기. 과배란으로 묵직해진 배를 감싸며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일찍, 나의 이름이 불렸다.


벌써 세 번째다.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고 배정된 칸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작은 사물함이 있는 공간에서 가운을 갈아입었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반가운 녹색 이불이 침대 위에 놓여 있다. 두툼하고 보드라운 이불을 덮고 누워있으니 금세 간호사가 들어왔다. 내 이름과 남편의 이름을 확인하고 신원 확인용 팔찌로 한 번 더 체크를 한다. 잠시 후 의사가 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간호사는 나가고,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된다.


이때 그냥 누워있는 건 아니고, 의사가 왔을 때 바로 시술하기 편하도록 자세를 잡고 있어야 한다. 다리를 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살짝 현타가 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인간인 듯 동물인 듯 애매한 경계에서 의사를 기다리다 보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테고 중요한 건 자세가 아니니까. 철학적인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긍정 파워를 끌어올리며 의사를 기다린다.


"선돌님. 인공수정 시술 시작합니다."

의사의 마지막 신원확인이 끝나면 시술이 시작된다. 기구를 넣고 주사기로 정액을 주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 남짓. 자기 연민에 빠질 시간도 안된다. 따끔할 수 있어요, 라는 간호사의 말에 살짝 긴장했다가 생각보다 안 아파서 금세 힘을 뺐다. 다 끝난 것 같은 느낌에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마치 정교한 소개팅 같은 시술을 끝낸 의사는 지난번과 똑같이 내 손목을 잡고 말했다.

"삼세번이니까, 이번에는 꼭 잘 됐으면 좋겠어요. 조금 쉬었다가 일어나시면 됩니다."


마스크 위로 반달이 된 눈은 친절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기운이 없던 나는 최대한 큰 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시험관에 비하면 과정이 간단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성공률도 낮은 것이 인공수정이다. 아마 이번이 나에겐 마지막 인공수정이 될 터였고, 의사도 만약 실패하면 시험관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그래서 더 간절하고 진하게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정말 잘 됐으면 좋겠고요,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십 분의 쉬는 시간이 길거라고 생각했는데, 긴장이 풀린 몸은 그사이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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