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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Nov 17. 2020

세 번째 인공수정하던 날 #1

엄마가 되고 싶지만 엄마에겐 비밀이었다

새벽 5시 30분.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거실 소파에 앉았다. 1년 넘게 기르고 있는 뱅갈 고무나무를 쳐다보며 멍을 때리다가, 지난밤 몇 번이나 돌려본 시뮬레이션이 생각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6시에 스트레칭을 하고, 6시 30분에 밥을 먹고, 7시에 샤워를 하고, 7시 30분에 병원으로 출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미리 시간계획을 하고 내용을 되뇌는 버릇이 있다. 


상큼한 컨디션이면 좋았겠지만, 사실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시술 전날 엄마와의 통화 때문이다. 시험관도 아닌데 굳이 친정엄마에게 알릴 필요가 있나 싶어 시술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괜한 걱정만 시킬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전날 저녁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시간 되니? 장례식장에 갈 일이 있는데 니가 대표로 좀 다녀올래?"

지방에 살고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서울에서 생기는 일에 가족 대표로 다녀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오빠보다는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기에 웬만하면 내가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내일은 시술이 있는 날.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차려입고 가야 하는 곳에 가기는 부담스러웠다. 


"아.. 어.. 장례식이면 꼭 내일이어야 되겠네요.."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시술 직후 회사에 가는 사람들도 있으니 큰 통증만 없다면 갈 수 있겠지만 괜히 무리했다가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됐다. 오후쯤이면 갈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마저도 자신이 없었다. 내 컨디션을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평소와 다르게 망설이는 대답에 엄마는,

"왜? 무슨 일 있어?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니?"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형사처럼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내일 인공수정 시술이 있다' 고 실토했다. 대답이 끝나고 아주 잠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엄마의 당황스러움과 걱정이 전해졌다.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못한 건 아니지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를 속이려던 건 아닌데, 비밀을 들켜버린 건 사실이니까.


"그럼 안돼! 응. 그럼 가지 마!"

예상 못한 대화의 흐름에 잠시 벙쪘다. 응? 뭐가 안된다는 거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가 덧붙였다.

"그럴 때 장례식장 가는 거 아니야. 엄마가 알아서 할게. 너는 가지 마"

아... 중간을 뛰어넘고, 아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장례식장에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부탁을 할 때마다 애교가 섞여 나오는 엄마의 말투는 처음과 달리 무척 단호해져 있었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처럼 매서웠다. 우리 세대와 달리, 임산부나 아기가 장례식장에 가면 안 된다는 미신을 믿는 어른들이 많다. 몰랐는데, 우리 엄마도 그런 어른 중 하나였다.


어떻게 통화가 끝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뭐라고 변명을 했지만 엄마는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어영부영 전화를 끊고 나니 왈칵 눈물이 났다. 이번 시술을 준비하면서는 거의 운 적이 없는데, 나의 눈물 버튼은 역시 엄마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엄마가 걱정하는 것이 미안해서인지,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인지, 세상 다 보라고 공개적인 글을 쓰면서 정작 엄마에게는 한마디도 못하는 내가 어이없어서인지. 


이런 사연으로 인해, 결국 눈이 부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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