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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Sep 11. 2023

사랑이 끝나던 순간.



      

  남편의 디스크가 터졌다. 움직일 수도 없고, 엄청난 통증이 수반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수술을 2번이나 했으니. 119에 연락했고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가던 남편을 뒤따라서 아이를 태우고 등원시켜주고  병원으로 따라갔다. 검사를 하면서도 내가 겪었던 통증을 고스란히 겪고 있을 남편이 안쓰러워 겉으로는 농담을 하며 곁에 있었지만 속으로는 애가 탔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 경과를 지켜보자는 그 일주일 동안 매일 남편에게 들렀고, 5년이 지나도록 육아의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몇 시간 케어하지 않는 그 시간도 버거운 아이케어와 집안일을 병행하면서 글쓰기를 놓지 않고 있었다. 걱정이 늘수록 공황장애와 우울증 약들은 늘어갔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에겐 남편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일주일 후 수술이 결정되어 병원을 전원하고 다시 병원으로 옮겨주고 수술을 하고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나는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용을 썼다. 남편이 없던 첫 토요일에 아이를 데리고 하루종일 꽃구경을 다녔고 일요일에 남편의 수술경과를 보기 위해서 옮긴 병원의 공원에서 나는 남편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다툼은 작게 시작되었다. 수술 후 금연으로 금단증상을 겪고 있는 자신 앞에서 왜 담배를 피웠냐는 것이다. 동생이 죽은 2주기에 나는 술과 담배와 눈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며 버티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버티지 못해 손목의 칼를 그었던 일. 그때 배운 담배는 동생의 슬픔이 가라앉았음에도  습관으로 남았다. 마흔이 넘어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쉽사리 끊지 못했는데 그 담배를 금연증상을 겪고 있는 지금 피우냐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끊임없이 배려만을 바라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에게 열흘이 넘게 내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고 매일 병원을 오가고 공황장애가 심해지고 우울이 심해지는 나의 힘듦 같은 것은 자신의 금단증상에 대한 배려보다 훨씬 더 후순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배려만을 바라느냐고. 내가 힘든 건 보이지 않냐고. 그래도 남편은 자신 앞에서 담배를 피워서 자신을 힘들게 했다는 것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도 피울 테니 자신의 몸이 어떻게 돼도 상관 안 할 거냐고 협박을 했다. 이것이, 내가 결혼 십오 년과, 연애 3년을, 근 이십 년을 남편을 사랑한 결과였다.


 그 순간, 나의 사랑은 차갑게 식었다.



   그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자신이 욕구가 없다는 이유로 너의 욕구는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나를 내 팽개치며 잠자리를 갖지 않았던 십 년이 넘는 시간들. 그리고는 이문제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도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표현은커녕 그 손조차 잡지 않게 된 몇 년이 넘는 시간과 출산 후 자연스레 쓰게 된 5년이 넘는 각방생활. 회사의 모든 문제, 사생활의 모든 문제를 내게 이야기하며 내게 답을 구했던 것. 그럼에도 나는 그를 위해서 건강을 챙기고 그의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애를 썼다. 결혼생활 15년 동안 회사를 수도 없이 그만두어도 당신만 있으며 된다고 늘 그를 다독였고, 아무리 급여가 작은 회사를 다녀도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임신 전 회사 그만두면 안 된다고 단단히 약속했음에도 출산 한 달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나는 주저 없이 괜찮다고 했었다.



   늘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잠자리를 갖지 않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 없는 것도. 직장을 몇 번씩이나 그만둠으로써 경제적으로 불안해지는 것도. 이런 것조차도 해결 못해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전부 괜찮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랑했다. 남편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렇기에 함께 헤쳐나가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견딘 시간 동안 남편은 당연히 배려받고 당연히 우선순위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모든 것들이 남편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되어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거기에  나는 절망했고 그 모든 부당했던 것들의 퍼즐로 맞춰지는 순간, 나는 사랑이 차갑게 식었다.





   누군가는 사랑은 무슨, 오래되면 정으로 사는 것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십 년 가까운 기간 동안 남편을 사랑했다. 오래도록 많이 사랑했다. 그 모든 모진일들, 부당한 것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의미를 잃고 말라버린 장미처럼 색깔이 바래져서 부서져 버렸다. 그러자 단 한 줌의 미련도 남았지 않음을 느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니.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남편도, 결혼생활도  나에게 의미를 잃었다.


  퇴원하는 남편을 데리고 오는 길에 나는 이혼을 이야기 했다.  내가 운전하는 차안에서 이야기 했으니 그때의 남편의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미안하다고 했을 뿐이다.  할말이 없다고.


그렇게 우리는 이혼하기로 했다.






 처음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할때 나는 꿈, 내지는 바램이 있었다.

 공황장애로 힘들어 하던 남편과 나의 삶을 극복하는 과정을 남겨놓음으로써 이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사랑이 끝남과 이혼의 과정을 쓰려 한다.



 삶이란, 참 알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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