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싫었던 베로나를 뒤로하고 이른 시간 베니스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베니스 기차역에서 단 하나에 오롯이 정신을 집중했다. 소매치기! 이탈리아가 워낙 소매치기로 유명하지만 특히 베니스는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누누이 들었으니 우린 바싹 긴장한 어깨로 두 개의 캐리어와 앞뒤로 맨 가방을 챙기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무거운 짐을 들고 마주한 베니스는 영화나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딱 100배 아름다웠다. 그 순간 밀려오는 감동은 셈을 할 수가 없었다. 짐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채 걷고 또 걷고 싶었다. 몇 시간 전 떠났던 베로나가 수줍게 자신의 매력을 과시했다면 베로나는 그야말로 번성, 번영한 도시의 자태를 당당하게 뽐냈다. "이탈리아 정말 좋구나."
우리 부부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날씨마저 거짓말 같았던 베니스. 얼른 천근 같은 짐을 떨구어버리고 이 도시에 흐르는 미친 듯이 아름다운 낭만에 녹아들고 싶었다. 남편과 나는 서둘러 호텔로 향하는 수상버스 바포레토에 올라탔다.
바포레토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또다시 내 마음을 온화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함께 버스에 오른 관광객들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부탁하지도 않은 우리 부부의 사진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찍어주는 관용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갈수록 고조되는 기분에 남편과 나는 두리둥실 풍선처럼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그렇게 호텔 근처이자 베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관광지의 명성답게 어딜 가나 사람으로 가득했고 굽이굽이 좁은 베니스의 길을 무거운 짐을 들고 헤처 나가야 했다. 길을 꽤 잘 찾는다 자부하는 내게도 베니스에서 길 찾기는 미로처럼 꽤 난도가 높았다. 또 왜 하필 그 순간 구글맵이며 애플맵이며 온갖 것들이 우리 호텔을 좀처럼 찾지를 못하는 건지... 같은 장소를 수차례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겨우 우리의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진땀을 빼며 어렵사리 당도한 호텔. 그런데 또 이 짐을 이고 끌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다행히도 그땐 오빠가 내게 커피를 잘 주었던지 짜증을 내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무난하게 서로의 힘을 합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래된 호텔이었지만 베니스의 더위를 한 번에 식혀주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방에서 우린 지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한바탕 웃었다. “그래도 도착했다!!!”
그때 나왔어야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오후 4시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1시간... 2시간... 3시간... 그렇게 6시간을 내리 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눈을 떠 시계를 봤다.
어머!!! 밤 10시야 오빠
필사적인 소매치기 방어와 무거운 짐, 더위에 고갈된 체력으로 남들은 1분 1초가 아까워서 바삐 다닌다는 베니스에서 그야말로 대(大) 자로 뻗어 자버린 거다. 다른 도시였다면 사실 '이참에 잘됐다' 하곤 그냥 내리 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인 베니스. 우린 밤 10시에 퉁퉁 부은 얼굴로 뛰쳐나갔다.
올 땐 너무나도 찾기 힘들었던 길을 따라 단숨에 광장에 다다랐다. 산 마르코 광장의 밤은 낮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적한 광장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여기 같은 장소 맞나? 어디를 봐도 낮에 비해 사람이 10분의 1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 밤 물길을 따라 탄식의 다리, 두칼레 궁전을 구경하며 산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베니스는 한산해졌다.
밤 11시쯤 그 유명한 카페 플로리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 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연주 음악을 들으며 와인과 아포가토를 먹었다. 낮과 달리 원하는 곳 어디든 앉을 수 있었고 연주자들의 음악에 집중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 산 마르코 광장을 채우는 악기 소리는 가뜩이나 낭만적인 밤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게 했다.
자정이 되었을 땐 텅 비다시피한 산 마르코 광장에서 남편과 나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노래에 춤을 추며 뛰어다녔다. 순간이 허락한 자유를 최대치로 즐기며 낯선 곳에서 일상의 일탈을 감행했다. 그날 밤 내 눈에 내 가슴에 남은 모든 것이 생생하다. 밤의 베니스 우리가 또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