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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준 Jan 16. 2020

이별에 관하여

우리는 누구와, 언제든. 이별할 수 있다.

만남.


우리의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친구와의 만남, 연인과의 만남, 직장 동료와의 만남. 수없이 계속되는 만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만남은 맺음을 만들어낸다. 맺음으로부터 서로와 서로의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가 그렇게 얽히고설키며 맺음으로 인한 관계를 늘려간다. 맺음. 다음은 이별이다. 맺음으로부터 이별은 시작된다. 아니, 맺음 때문에 이별이 시작된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사랑하는 연인과의 맺음이 되고, 그 맺음은 이별을 야기한다. 흔히들 말하는 이별. 사랑의 이별을.


이별.


사람들은 이별에 대해 많은 착각을 하고 있다. 정확히는 알고는 있지만, 잊는 것. 이겠지만. 이별이란, 사랑하는 연인과의 헤어짐을 이루 말하는 것으로. 마치 누군가는 나의 이야기가 이별에 관하여.로 시작하는 순간 사랑하는 연인과의 헤어짐, 이별 이야기일 줄 알았던 것처럼. 물론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야기가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것만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별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 말고도, 많으니까. 직장을 옮기며 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와의 헤어짐도 이별이며, 점점 일이 바빠져 연락조차 닿지 않는 친구와의 멀어짐도 이별이다. 또, 사랑하는 반려견이 아주 조금. 정말 조금 먼 곳에서 서로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다림도 이별이다. 가족들과의 헤어짐.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과의 헤어짐까지도.


우리의 만남은 수많은 곳에서 일어났고, 거기서 셀 수없을 정도의 맺음이 이루어졌기에 우리에겐 많은 이별이 남아있고,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와, 언제든 이별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수많은 이별보다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을 떠올린다. 가장 접하기 쉽고, 가장 익숙하고. 가장 와 닿아서. 더 깊게 떠올리는 이가 있다면 부모와의 이별도 포함할 수 있겠다.


이별. 그 후의 이야기.


사람과의 만남으로 시작해 수많은 이야기들을 거쳐 맺음으로,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거치고, 거치다 이별을 맞이하며, 서로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기에, 이별이라 하면, 끝,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겠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서로의 이야기가, 어느 한쪽의 이야기로 재시작될 뿐이다. 이별이라는 것에 슬픔의 의미가 부여된 것도, 이 이별 후의 이야기, 누군가는 계속 써 내려갈 이야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계의 끊어짐으로 시작된 이별이라면, 서로 다르게 펼쳐질 이야기일 것이고, 세상과의 끊어짐으로 시작된 이별이라면, 혼자만 써 내려갈 이야기겠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홀로 남아 묵묵하게 써 내려가는, 써 내려가야 하는 이야기. 애석하게도 계속 살아남았고, 살아가야 하기에 써 내려가야 하는 이야기.


이것이 우리가 이별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고,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언제나 이별은 찾아올 수 있고, 언제나 우리는 홀로 남아 이야기를 써 내려가게 될 수 있으니까. 갑작스러움이라 할 것 도 없이, 당연스럽게 찾아올 이별 뒤에,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고, 살아가야 하니까.


언제나 기억하고, 되뇌며.

언제나 우리의 만남이, 맺음이.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안일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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