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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re Dec 31. 2023

소개팅엔 제육덮밥

설레고 어리숙했던 첫연애의 기억

 때는 2002년 가을, 전국적인 월드컵 광풍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절, 연애 사업에 별 진전이 없던 복학생에게 반가운 낭보가 들려왔다. 소개팅. 이 얼마만의 소개팅인가! 상대는 글을 잘 쓰는 신입생이라고 했다.


 군대 가기 전에도 그렇고, 다녀와서도 그렇고,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PC방 다니던 게 일상이었던 시절, 연애는 먼 나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지독한 짝사랑만 해봤지, 나 좋다는 사람에게는 늘 미안했고, 내가 좋다는 사람은 늘 나에게 미안해했다. 그렇게 같이 어울리던 동기 중 하나가 글을 잘 쓰는 친구가 있는데 한 번 만나보겠냐고 이야기를 꺼냈고, 그 친구가 쓴 글을 읽어보라며 메일도 보내주었다. 사실, 나는 인문대학생으로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오히려 괴물같이 글을 잘 써내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던 때라, 글을 잘 쓴다는 게 처음엔 딱히 매력으로 느껴지진 않았던 거 같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친구의 추천인만큼,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소개팅 약속을 잡았다.


 인스타도, 카톡도 없던 시절, 소개팅 장소는 유명한 강남역 7번 출구였다. 지금이야 신분당선도 생기고 출입구 번호도 바뀌었지만, 당시 강남역에서의 약속은 거진 7번 출구 앞이었다. 학교 앞 먹자골목을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약속은 강남역 7번 출구 앞에서'. 그렇게, 각자 만날 사람을 기다리는, 수많은 다른 이들과 함께 지하철 출입구 앞에서 얼마간 기다렸을까, 정말 앳되고, 귀여운 스무 살의 그녀를 만났다. 무거웠던 그녀의 글과 달리, 정말 신입생답게 귀엽고, 재잘재잘 말도 잘하는 친구였다.


 일단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었으니, 같이 밥을 먹으며 서로를 알아가야 할 터였다. 나는 당연히 예의 있게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봤을 거고, 상대는 아무거나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자고 했을 거다. 아무거나라... 그럼 맛있는 걸 먹어야 할 텐데, 너무 결정 못하고 돌아다니면 배고플 텐데... 하지만 강남역에는 당최 나와본 적이 없으니 뭐가 맛있고, 무슨 식당이 어디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커다란 분식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거다! 저기라면 없는 메뉴가 없으니, 뭐든 맘에 드는 걸 골라 먹을 수 있고, 맛있는 제육덮밥과 돈까스도 팔겠지. 꽤나 합리적인 판단을 마친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저기 가서 제육덮밥 같은 거 드실래요?"


 그렇다. 당시 남자 대학생들에게 제육덮밥은 돈까스와 호각을 이루는 맛있는 음식의 양대산맥이었다. 술 마실게 아니라면, 라면 먹을 거 아니라면, 길거리에서 토스트나 떡볶이를 집어 먹을 게 아니라면,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고, 빨리 나오고, 더군다나 분식집에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수많은 다른 메뉴들도 많지 않은가? 상대의 반응을 전혀 눈치채지 못 한 나는 둘이 만난 기념할만한 첫 식사를 강남역의 이름 모를 분식집에서 함께 했다. 정작 식당에 가서는 뭘 시켜 먹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해보니,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하고, 무척 재미있었다는 것만 기억나고, 상호도 메뉴도 기억 안나는 첫 식사가 상대에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는, 당연히 나중에 이야기해 줘서 알았다.


 내가 밥을 샀으니, 2차는 본인이 사겠다고 해서, 카페였나, 아니면 술집이었나, 자리를 옮겨 한참을 이야기했더랬다. 좋아하던 영화 이야기도 하고, 고래가 나오는 꿈을 꾼 이야기도 하고, 책 이야기도 하고, 노래 이야기도 하고,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만족스러웠던 소개팅은, 바래다 줌 없이(?) 지하철 역에서 빠이빠이 하는 걸로 마무리지었다. 돌아가며 생각해 보니 내가 밥을 산 것보다, 2차 비용이 더 많이 나온 게 미안했고,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걸 사줘야겠다고는 생각했던 것 같다.


 훌륭히(?) 성사된 소개팅을 바탕으로 1년 정도 그녀를 만났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많은 걸 배웠다. '아무거나' 먹고 싶다고 해서 정말 '아무거나' 먹으러 가면 안 되는 거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단순히 '움직일 연료를 충전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다려야 할 때와 그렇지 말아야 할 때에 대해서, 수많은 반복학습을 거쳤고, 인연의 끈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쉽게 놓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함께 하며 다른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녔지만, 그 무엇도 첫 만남의 제육덮밥이 주었던 강렬함을 이길 순 없었다.


 그 뒤로도 가끔 혼자 급하게 끼니를 때워야 할 때면, 오래되어 보이는 분식집을 찾아 제육덮밥을 시켜 먹곤 했다. 특히 배가 고픈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릿한 첫 연애의 추억을 반추할 수 있는 음식이 좀 더 근사한 것이었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하지만, 전국 팔도 어딜 가도 만날 수 있는 메뉴인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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