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피맛골 입구의 원 테이블 파스타 집 '종로 한 평'
2000년 대 초반, 서울에 맛있는 파스타 집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강남역, 대학로, 신촌, 종로 등에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멋진 파스타집들이 마구 생겨났고, 당연히 데이트 필수코스가 되어갔다. 하지만, 딱히 데이트할 만한 여자친구가 없는 남자 대학생들에게 파스타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이상하긴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자 혼자, 또는 남자애들끼리 여자들로 가득한 파스타집을 간다는 건 뭔가 굉장히 어색하고, 부끄럽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연애 중이 아니라면, 파스타가 먹고 싶어도 먹으러 갈 수 없는 슬픈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했다. 실제로 남자들끼리 술 마시다가 "아 파스타 먹고 싶어서 연애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직접 육성으로 들어 본 적도 있다. 아무튼, 당시 스무 살 무렵의 대부분 남자 대학생들에게 '파스타'는 '여자친구가 생겨야만 먹을 수 있는' 신비한 음식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내게도 드디어 파스타를 아주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덕분에 번화가에 있는 근사하고 예쁜 파스타집들을 처음 가봤고, 맛있는 파스타 요리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신촌이나 강남역에서 꽤 유명했던 <노리타>, <뽀모도르> 같은 파스타집을 많이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매번 이끌려 다닐 수만은 없는 법, 나도 그냥 맛있는 밥집, 술집 말고, 좀 더 근사한 파스타집을 하나 찾아서 한 번 데려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파스타집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설사 새로운 파스타집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유명한 곳들은 이미 여자친구가 잘 알고 있거나, 가본 적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으로도 뭘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시절, 여자친구가 모르는 근사한 파스타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만 갖고 있던 차에 인터넷에서 맛집들을 소개해 주는 (당시에는 맛집이라는 표현도 별로 없었다) 기사를 하나 읽게 되었다.
'테이블이 하나밖에 없는 피맛골의 이색 파스타집'
굉장히 독특한 맛집 소개였다. 술집과 노포들이 가득한 종로 피맛골에 파스타집이라니! 더군다나 가게가 매우 좁아서 테이블도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집이었다. 사장님 이력도 매우 독특했는데, 원래 요리사가 아니었지만, 이태리에서 살다 오신 경험으로 제대로 된 파스타를 선보이고 싶어서 직접 가게를 차리셨다는 소개가 함께 붙어있었다. 매일 아침 시장에서 구한 신선한 재료들로 메뉴를 정하고, 칠판에 적어놓는다니, 굉장히 전문적이고 멋있어 보였다. 여기를 가보자! 여자친구도 분명 대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만 많이 가봤지, 피맛골에서 파스타를 먹어본 일은 없을 것이다. 대단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그 가게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언젠가 한 번 꼭 데리고 가리라 생각했다.
지하철 타고 다니며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좋아했던 우리는 어느 날 광화문에 가보기로 했다. 목표는 당연히 피맛골의 그 파스타 집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를 수도 있으니, 굳이 그 집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안 하고, 그냥 피맛골이라는 곳을 놀러 가보자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피맛골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으니, 광화문 교보빌딩을 돌아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골목을 들어서자, 정말 말도 안 되게 작은 파스타 집이 나타났다. 작은 주방은 길가에 거의 나와있다시피 했고, 네 명 앉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작은 테이블은 과장 조금 보태서 길바닥에서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나는 우연히 재미있는 집을 발견한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아담한 크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저기에서 파스타를 먹고 있으면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 같았다. 이런 나의 생각과 다르게 여자친구는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더군다나 자기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사장님의 모습이 주는 알 수 없는 신뢰감까지 더해져 우리는 그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길거리에 나앉은 작은 테이블에 둘이 앉아서, 혹시 다른 사람들이 자꾸 쳐다볼까 봐, 위생적으로 뭔가 큰 문제가 있을까 봐, 결정적으로 음식이 입에 안 맞을까 봐, 계속 여자친구의 눈치를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정확히 우리가 무슨 파스타를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맛을 본 여자친구가 매우 만족스러워하던 모습만 기억할 뿐이다. 그렇게 '피맛골 길바닥에서 파스타를 먹어보자!'는 그날의 데이트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경험으로 남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파스타집을 가보진 못했다. 그 이후 피맛골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거대한 빌딩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과정 속에서 한 평짜리 그 파스타집도 사라졌다. 그리고 피맛골 재개발 소식이 들려올 즈음에는 이미 함께 파스타를 먹었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뒤였다. 피맛골이 사라진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이 바로 그 파스타집이었다. 오래된 생선구이집도 아니고, 국밥집도 아니고 전혀 그 동네와 어울리지 않았던, 하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던, 마치 꿈같았던 파스타집. 이제 더 이상 찾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날의 기억 역시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비록 그 아쉬움을 함께 나눌 사람은 이제 곁에 없지만, 지금도 피맛골 자리에 들어선 거대한 빌딩을 지날 때면 그때의 기억이 생각난다. 그런 때가 있었고, 그런 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