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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 Jul 27. 2020

앨리스는 왜 이상한 나라에 갔을까?

♪상자루 - 앨리스 공황상태


♪상자루 - 앨리스 공황상태



어... 모르겠어요 분명 묻고 싶은 게 있었던 거 같은데 토끼를 쫓는 동안은 초조하지만 어떤 희망이 있었어요. 잡으면 그때야 알 것 같은... 근데 잡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은 안 해봤어요. 토끼를 잡는다면 어... 잡으면... 아 그 토끼란 거... 애초에 잡을 수 없는 거 아니었을까요?

상자루-앨리스 공황상태 中 내레이션


지금에야 이렇게밖에 글을 못 쓰는 나지만,

의외로 어릴 적 꿈은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이었다.




꿈이라고까지 해야 하나. 특별한 계기는 없이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학창 시절 독후감, 시 쓰기 대회 같은 것에서 줄곧 1등을 했던 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글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글로 돈을 벌기 전, 그러니까 생각만 하던 때 즈음 그것만으로는 먹고살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단 고등학생 때는 사진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보통 잡지나 신문을 읽으면 사진이 글과 함께 있었던 이유에서였다. 당시엔 필름 카메라밖에 없어 필름 값을 대는 것도 일이었던 기억이 있다. 가난한 학생이라, 연사는 꿈도 못 꾼 채 대포부대 옆에서 알음알음 물어가면서 한 컷 한 컷 찍는 연습을 했었다. 사진을 조금 찍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연사 기능이 있는 이유가 있다. 수도 없이 피사체가 뭉개진 사진들을 받아 들고도 뭐가 좋다고 매주 한 번은 돈도 안 될 촬영을 위해 밖을 나섰다.    






조금 길을 돌아가는 모양새긴 했지만, 글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는 글에 조금이나마 더 보탤 것이 있는가 싶어 음악을 조금 건드렸다. 주로 일하던 곳이 홍대이기도 했던 이유도 있다. 조금 자만하자면 혹시나 내가 작사가, 나아가서는 빌어먹을 정도의 싱어송라이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던 때였다. 해봐야 간단한 엔지니어로서의 일과 취미 생활만도 못한 베이스 주자로 살았다. 물론 노래방에서나 인정받을 실력의 음악인이 되어버린 터에 싱어송 라이터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저 글감을 받을 수 있는 영업 창구 정도로 활용되었다. 그래도 덕분에 입에는 풀칠하고 기름칠도 조금은 할 수 있게 되어 당시엔 테이블 차지도 붙는 이자카야의 단골이기도 했더랬다.


글에 대한 연습의 의미로도, 원래 글을 쓰는 것은 좋아했으니까 당시 붐이었던 블로그도 시작했다. 나름 글을 팔 수 있을 정도는 썼던지라, 포털 사이트에서도 제법 내 글을 사 가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포털에 글을 올려달라며 소정의 활동비를 지원한다던가 하는 일도 있었다. 돈으로 따지면 활동비는 월 5만 원에서 10만 원 정도. 가끔 10-20만 원 정도의 기고도 요청받았다. 평소 글 하나를 팔 때 가격에 비해선 턱없이 낮은 가격이었지만 뭐, 취미니까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싸이월드 미니룸의 배경음을 사거나 ( 당시 천곡 가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깝네. ) 예의 이자카야에서 하룻밤 술값으로 치렀다.






나이가 들어 졸업할 즈음 내 진로를 슬슬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언제까지고 네가 글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이만큼 일할 체력이 될 거라 생각하냐는 걱정을 할 때였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손쉽게(?) 취업을 했더랬다. 하던 일이 홍대 바닥이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합격한 곳 중, 견실한 곳의 사무직보다는 조그만 원룸에 차려진 글을 쓰는 회사를 선택했다. 적당히 디지털 유저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력서 앞장에는 블로그나 포털에 글을 썼던 내용을 채우고, 뒷장에는 하고 있던 일에 대한 미래와 꿈에 대해 썼다. 디지털에도 음악 잡지를 만들고, 광고를 붙이고, 제휴를 하고, 구독도 시키자.


불행히도 이력서는 앞장만 읽혔는지, 뒷장의 일은 도전할 일은 없었고 처음 담당한 일은 취미로 쓰던 블로그 작성이었다. 취미가 일이 된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검색에 노출을 시켜야 하는 방법이나 무슨 며느리, 무슨 담당자 같은 이름으로 분하여 그에 어울리는 어투로 글을 쓰는 것이 자존심도 상하고 멋이 없어 반항도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해보는 조직 생활은 그 불만만큼 재미가 있어 몇 달이 지나서는 나도 모르게 경쟁적으로 포털의 입맛에 맞는 글들을 기계적으로 적어냈다. 당시엔 그런 광고성의 작위적인 글도 잘 먹히던 때라 지하철에서 급하게 20-30분 안에 쓴 글들도 포털의 메인에 올라갈 정도로 어느샌가 그런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 삯은 받지 못하고 조그마한 월급으로 바뀐 점은 다른 이야기지만. 처음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통장이 반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미래에는 괜찮아지겠지 하며 버텼다.






디지털은 너무 빨리 변한다. 장문의 글과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시장도 자연스럽게 트위터와 같은 짧은 언어나, 페이스북과 같은 이미지 중심으로 옮겨졌다. 회사의 이름에도 글을 뜻하던 단어가 빠졌다. 회사에 몸담고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짧아진 콘텐츠 유행들을 급하게 익히기 시작했다. 나름 PC통신 시절부터 파워유저였던 커뮤니티, SNS 문화 아니겠는가. 나름 빨리 익혔다. 당시에는 벤처 회사가 막 생겨나고 애플리케이션 만드는 것도 붐이랍시고, UI/UX 따위의 것들도 익혀 보았다. 혹시나 이런 콘텐츠를 담을 그릇을 만드는데 내가 참여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니까 입사 때의 꿈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고 우리가 사이트에서 흔히 보는 이벤트 페이지 따위의 구도를 그리는 데에만 쓰였다. 그래도 그때는 그때 나름의 재미와 보람은 있었다만.


몇 년이 지나서, 장문의 글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언젠가는 하루에 서너 개의 글들을 쓰기도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에 서너 개의 이미지와 흔히 '카드 뉴스'라 불리는 것들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하던 촬영은 이미지에 들어갈 연출 사진을 찍는데 활용이 되는 것에 위안을 가졌다. 혼자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회사 단위로 물량이 많으면 좀처럼 혼자 할 수가 없던 것이더라. 그래서 '팀'이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팀에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디자인을 하는 사람도, 혹은 개발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는 점점 만들기보다는 기획을 담당했다. 회사는 연차가 쌓이면 월급이 올라가고 밥값을 위해선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밥값을 위해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글을 쓰는 것을 멈추었던 때가 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마 팀장이라는 이름을 달 즈음에는 몰래 다른 곳에서 요청받아 쓰던 글도 그만두었던 걸로 기억한다.  






디지털은 그러니까, 빨리 변한다. 이미지와 사진으로 해결되던 우리네 일은 이제 영상이라는 영역에 접어들었다. 당시의 조직은 영상에 익숙하지 않은 조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것을 해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개인적인 사명감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어느새 열 명 남짓한 팀원의 팀장이 되었고 내 욕심만으로 살기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에, 그저 이 흐름이 맞추어 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고 그들과 함께 '이 것이 지금 디지털의 최신 트렌드입니다!!' 따위의 설득을 하며 우리의 콘텐츠를 파는 일을 하였다. 아마 처음 이백만 원 정도의 영상을 설득하는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부터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열 명 정도의 조직은 사오십 명의 조직으로 불어났고, 회사에도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TV에 나오는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도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우리 회사도 광고회사 다 되었구먼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몇 개월 동안 팔기 위해 끙끙거리던 규모의 영상도, 지금은 내가 관리하고 있는 고객들에게 하루 몇 개의 영상이 나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나와 처음에 일하던 동료들은 어느덧 어엿한 팀을 꾸리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기획을 하는 일을 그들에게 타의로 물려주고 멀어지게 되었다. 그들도 밥값을 해야 하고, 나도 새로운 밥값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인가,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찾으려면 많았다. 학생은 아니지만,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혼나기도 했으니 직장인이 혼날 수 있는 영역에서는 만점을 받는 것 같다. 나름 아파도, 힘들어도 새로운 자리에도 적응하려 열심히 일했지만, 그런 정 같은 이야기는 커진 규모의 회사와, 숫자와, 성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저 나는 글로 밥만 벌어먹어도 행복할 사람이었는데,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글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비교를 당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인가 팀원들의 관리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칙연산을 두고 숫자로 환산하는 것이 내 일이 되었다. 물론, 그 숫자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는 그것만으로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디자인을 하는 것도, 영상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던 것도 아니니 무언가를 예쁘게, 잘 만들었다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힘들게 되었다. 언젠가 내 글을 보고 너무 좋았다며 우리 소속사 사람들의 소개글을 모두 써줬으면 한다는 어느 대표님의 이야기가 떠올렸다. 내 글도 예뻤던 시절이 있었던 증거다. 그런 호시절은 다 갔는지, 얼마 전에는 '당신은 이런 것도 부족하고, 저런 것도 부족하니 님은 글을 쓰시죠!' 라며, 그것이 내가 살아나갈 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쓰려던 글이 이런 도망과 추락의 끝에 있던 것이었나.


얼마 전엔 디지털에 올린 긴 글을 읽는 구독자들을 모으고, 더 좋은 글을 위해 작가들을 모으는 일을 하는 회사의 이직 제의를 받았다. 여러 이유로 그 자리는 거절했지만, 10년 전에 혼자 꿈꾸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박수를 치고 입맛을 다시긴 했다. 또 얼마 전엔 내가 생각하던 글 값의 네 배를 부르며 자신의 글에 자부심을 가진 분과의 만남이 있었다. 자부심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잘 팔고 계시더라.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지만 여전히 글은 가치가 있고 먹고살만한 일이다. 바뀐 것은 나밖에 없었다.



 

잠을 못 자니, 대신 꿈을 자주 생각한다.

해외 도심 외곽의 어느 조그마한 2층 주택 집. 앞에는 풀밭이나 논밭이 있고 조금만 발품을 팔아 걸어 나가면 물가가 있다. 20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타고 나가야 역 근처에 겨우 조그마한 마트가 있고, 골목 곳곳에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마당에서 이불을 두드리거나, 햇볕을 쬐는 그런 동네. 그런 곳에서 소일거리로 글을 쓰고 주말에는 1시간 넘어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들어와 또 어딘가에 팔 사진들을 찍을 겸 도시 구경을 하는 나날. 현장의 사람들과 친해져 취재나 스태프 따위의 일거리도 받아 몸도 좀 움직이고, 남는 시간에는 영상도 공부하며 2층 중 한 층은 촬영장으로 만들어 소일거리도 하는 삶. 가끔은 한국으로 돌아와 깻잎을 잔뜩 사서 할머니께 잡숴보시라며, 보따리 장수도 하며 부족한 생활비나 외식비도 벌고. 한 보따리장수님이 한국 깻잎이 그렇게 잘 팔린다더라고.


현실에서는 화를 내었다.

언젠가는 위의 꿈을 누군가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모두들 공감하며, 멋지다며 우리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술잔을 기울였는데, 지금의 내 주변에서는 그런 삶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갸웃거린다. 서울에 집도 있는 녀석이, 버젓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 복에 겹다면서 지금을 더 잘 살 고민을 하라며. 강남에 들어가야 '격'이 생긴다, 아직 멀었다, 더 해야 한다는 조언도 심심찮게 듣는다. 그런 현실에 화를 내었다. 내가 마주한 문제에 대해 남에게 그 잘못을 돌리고 있었고, 내 행복을 위해서 고민하는 것이 죄냐며 가족에게도 화를 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어느샌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남에게 상처 받고, 남을 상처 입히는 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이 상처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상처는 상처다.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든 나쁘듯이, 그저 글을 쓰고 싶어 했던 나는 어느샌가 악당이자, 피해자가 되어있었다. 그런 현실이다. 어느샌가 꿈은 꿈이 되었다. 비겁하게도,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 따위를

글감 삼아 아쉬움을 달래는 글밖엔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는 긴 이야기로 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 보았다.

이런 시대에는 글의 처음과 끝만 읽으면 된다는

조금은 철 지난 밈(meme)이 떠올라서

첫 줄과 마지막 문단을 글에서 떼어놓았다.




세상의 수많은 앨리스들은 토끼를 놓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토끼는 최선을 다해 쫓아도 잡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토끼를 놓치고 시간이 지날수록 토끼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흐려진다. 목적도 함께 흐려진다. 만약 토끼가 제 발로 굴러와 내 손에 잡힌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토끼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건지 토끼를 잡아 가두려고 했던 것인지 어떤 게 목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상자루-앨리스 공황상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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