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d Nov 09. 2020

변한 것과, 변함없는 것

Aimyon - 안녕을 말하는 오늘에

무언가를 잘라내야 현재가 있다면
'한 번 더' 같은
그런 억지는 부리지 않을게
그래도 여전히 지금도
바라는 것이 있어



あいみょん – さよならの今日に : 처음 갔던 일본, 길을 잃었던 시부야의 그 장소에서 촬영한 MV라, 추억도 함께 떠올리게 해 줘 좋아하는 영상



십 년보다 조금 더 이전에 있었던 일화다.

당시의 나는 글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고 있었고, 여느 때처럼 원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러 찾아 간 사무실에서의 일이다. 당시의 계절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창 밖의 햇살이 꽤 풍성하게 들어와 그 공간을 채웠던 것은 떠오른다. 미팅을 할 장소로 걷는 중에 들려온 음악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것도 기억한다. 'maximilian hecker'라는, 적당히 홍대병을 앓는 사람들이라면 알 법한 아티스트의 노래였다.


" 일하면서 노래도 들을 수 있나 봐요."

" 네, 노래 좋죠?"


내가 알고 있는 사무실이란,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모 건설사의 사무실에 견학을 갔을 때 보았던 삭막했던 공간과 구십도 인사를 하던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란 이미지여서, 편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모였고, 거기에 노래까지 흐르는 사무실아무래도 어색할 따름이었다. 심지어 노래 좋지 않냐고 되묻는 곳이라니. 그리고, 우습지만 그것이 내가 막연하게 '회사'라는 곳에서 '함께'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계기이다. 생각보다 회사라는 것 나쁘지 않잖아?라는 생각이었더랬지. 아마, 그다음 날인가 뒤늦은 자격증이랄지, 어학 공부를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결국엔 그것들 모두 딱히 쓸 일은 없이 취업을 하게 되었지만. 그러니까, 기억의 그 날로부터 십 년이 좀 더 지났고, 얼마 전 첫 회사인 곳에서 십 년을 꼬박 채웠다.






처음 회사라는 곳에서 일을 시작하는 나의 첫 목표는 '십 년은 채운다.'라는 막연하고, 우스운 그런 것이었다.  주변에서 '그런 회사는 십 년도 못 가서 망할 거야.' 라던가, '지금이라도 도망쳐.' 라던가 라는 충고나, 저주에 가까운 말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늦었지만 첫 목표는 달성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나. 되돌아보면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언젠가의 글에도 남겨놨지만, 글을 만들고 팔던 나는 이제 없다. 이젠 워드보다 파워포인트나 엑셀이 좀 더 익숙한 직장인이 되었다. 글이라는 것은 보통 버려질 쪽지나 메모장이면 충분한 것이 되어버렸다. 도무지 팔일 없을 글들만이 써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쓴, 앞으로 써질 문장과 문단과 같은.


잃어버린 글만큼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사원, 대리와 같은 이름 대신의 무언가가 적힌 명함을 수도 없이 뿌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몇십 명이 한 층에서 일을 하고 그들과 함께 일을 한다. 그들이 없다면 지금의 일을 할 수 없으니, 함께 일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혼자 일한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만큼의 책임을 배웠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 외의 무언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무게를 시간이 갈수록 느끼게 되었다. 책임을 지지 못했을 때의 아픔도 배웠다. 책임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지금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책임이라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원룸이었던 사무실이 이젠 건물이 되었다던가, 나도 내 몸 뉘일 집 정도는 생겼다던가 따위의 다른 것들도 있겠지만, 내 삶의 십 년을 되돌이켜 보자면 위의 세 가지가 가장 변한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것들은 회사 생활을 시작한 십 년간 변함없이 나의 삶에 무언가를 새겨나갔다.  


학생 신분으로 조잡한 글을 만들어 팔았듯이, 여전히 나는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조잡한 다른 무언가를 어설피 팔고 있다. 글을 팔던 대신, 몇몇 문서를 만들어 팔고, 삯이 모자란 탓에 마음마저 팔았다. 새벽녘에 글을 써 내려갔듯이 그것들을 새벽까지 만들어 왔는데, 얼마 전에는 나를 '병신'이라 스스로 불렀다. 문득 나마저도 내가 그렇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그 날은 조금 부끄럽지만 울었다.


혼자일 때와 변함없이 외로움은 계속해서 쌓여갔다. 홀로일 때는 일 인분의 외로움을 떠안으면 되는 것인데,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먼저 떠나보냈던 사람들이 놓고 간 만큼의 외로움도 떠안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고, 또 외로움을 떠안는다. 어떤 때에는 함께 있는 누군가가 외로움을 떠안길 때도 있다. 그렇게 함께 일한다. 분명, 혼자 일하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 이다.


나를 책임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는 책임 속에서 나에 대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질 수도, 그럴 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일을 하다 가장 슬픈 순간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책임을 지지 못할 때라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십 년을 꽉 채운 그 날, 그래도 남아있는 어린 마음에 몇십 년을 한 직장에서 근속하셨던 아버지께 십 년을 근속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이후의 시간들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아버지의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다. 1990년대 십 년 근속으로 금 두 냥을 받았다는 아버지의 자랑을 들었다. 너희 회사는 뭐 준다니 라는 질문을 받았다. 글쎄요, 고생했다는 진심 어린 인사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며 웃었다. 글쎄, 나는 인사를 받았을까?  


앞으로 내 삶에서 이런 날을 세는 날은 없을 것이다. 

십 년을 꽉 채운 그 날에는 그런 다짐을 했더랬다. 이 글은 그저 어린 날에 혼자 되뇌었던 목표를 이루었노라 마침표를 찍는 글이다. 어제라는 것은 사실 이미 없는 것이고, 삶은 오늘과 내일이라는 두 가지 날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날의 햇살이나 음악은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어도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정도의 어른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일의 언젠가, 언젠가의 그 장면과 노래는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생했다. 그래도 고생했다.

내일도, 내일도. 고생하자꾸나.

미안해.





* 4분 40초, 아이묭이 캐주얼한 밤색 야상을 벗고 흰 수트 차림으로 시부야의 재개발 구역을 걷는 장면. 변해가는 공간과 시간에서, 변하는 모습이 꽤 인상 깊다. 걸음을 멈추고 공사장에 널브러진 의자에 널브러져 앉는 장면도, 알 수 없을 표정까지.

작가의 이전글 이야기를 처음부터 읽어주신 분에게 전하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