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묻기 시작했다. 그것도 우리가 듣고 싶은 질문이 아닌, 순수하게 자신이 묻고 싶은 질문을 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느덧 여든의 나이를 넘긴 고령의 거장이 묻는 질문이라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질문이다. 이제는 인생에 대한 의문이 아닌, 해답을 가지고 있을 법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에게 다가와 비로소 묻는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 것이냐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일본이다. 지금이 전시 상황임을 보여주는 총탄이 난무하는 전투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거리를 오가는 탱크와 행진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전쟁이라는 '상황'이 아닌, 전쟁이라는 그 상황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곧 죽음과 마찬가지다. 전쟁터에서는 타인의 죽음이 나의 생존이며, 반대로 나의 죽음이 타인의 생존이 되기도 한다. 전쟁터에서 우리 모두가 생존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삶과 죽음이 단 몇 초만에 판가름 나는 이 잔혹한 전쟁터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잃는 '상실'이라는 경험을 피할 수 없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삶조차 언젠가 죽음이라는 상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전쟁터라고 하야오는 말하는 듯하다.
이 현실의 전쟁과 동떨어져 보이는 마히토 역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으며 자신만의 작은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는 전쟁이라는 사회적 재난을 비교적 공감하기 쉬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재난으로 치환함으로써,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실이라는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당연하지만 상실을 회복하는 과정은 전혀 쉽지 않다. 마히토는 여전히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또한 아버지의 새아내이자, 어머니의 동생인 나츠코를 향한 마히토의 불편한 감정 역시 스멀스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마히토가 겪는 상실이라는 무력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폭력성이라는 분노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나약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 분노의 화살이 향하는 곳은 바로 마히토 자신이다. 시골의 학교로 전학을 간 첫날, 마히토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폭력을 경험하며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또다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약한 자신에 대한 분노는 끝내 자해로까지 이어진다. 마치 폭력이라는 것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이 장면은 지브리 영화 중에서 선혈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과감하며 잔혹하게 그려진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채 돌아온 마히토를 본 아버지는, 그를 보며 공감이 아닌 복수라는 위로를 건넨다. 나에게 해를 끼친 이에게 똑같이 해를 끼친다. 이 폭력의 대물림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바로 영화의 시작부터 앞서 등장한 '전쟁'이다. 그의 직업이 전쟁이라는 폭력에서 이득을 취하는 군수공장의 사장이라는 점 또한 이미 그가 폭력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있는지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마히토의 죄책감은 자신을 유혹하는 왜가리를 만나며 마침내 폭발한다. 칼을 갈고, 화살을 만들며 똑같이 폭력으로 되갚아주려는 마히토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기엔 조금 거부감이 들 정도다. 왜가리는 이런 마히토를 죽은 어머니로 유혹하며 낯선 세계로 끌어당기기에 이른다.
누구에게나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왜가리의 말에 말로는 거부하면서 결국 행동으로는 그를 따라나서는 마히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말이다. 그 상실의 시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마히토는 왜가리 남자를 떠나 이세계로 향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
마히토는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씩씩한 어른으로 성장한 키리코를 만나며 상처를 딛고 자라나는 법을 배운다. 또한 그녀와 함께 직접 잡은 생선을 해체하며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생선이라는 한 존재의 죽음으로 인해 와라와라라는 미숙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며, 또 그 생명체들을 팰리컨이 잡아먹고, 그 팰리컨은 다시 히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기도 한다.
이는 죽어가는 팰리컨과 마히토와의 대화를 통해 더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왜 무고한 와라와라를 잡아먹느냐는 마히토의 물음에 팰리컨은 그것이 이 세계의 섭리라고 답한다. 삶과 죽음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순환하는 세계. 이 거대한 세계의 흐름은 자연의 먹이사슬, 또는 인간이 저지르는 전쟁이라는 살육이 떠오르기도 한다. 단지 이 두 가지 죽음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필연성이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 전쟁은 그 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이해관계가 섞여있는, 사실상 불필요한 죽음의 연속들이다. 마히토는 죽은 왜가리를 땅에 손수 묻어주며 이제 화살이 아닌 삽을 들고, 폭력이 아닌 평화와 화해를 통해 이 세계와 자신이 사는 현실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마히토는 자신이 살아가는 냉혹한 현실의 형태를 띠고 있는 세계들을 지나, 히미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나며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따스한 현실에 도달한다. 평화롭고, 생존을 위한 음식이 있으며, 언제든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는 세계. 이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이곳에서 마히토는 처음으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살아갈 이유를 발견한다. 바로 사랑이다.
마히토는 이제 상실의 극복은 누군가를 향한 증오가 아닌, 사랑에서 시작됨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증오했던 것들을 사랑으로 품기 시작한다. 자신을 농락하던 왜가리는 든든한 친구가 되며, 나츠코를 '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상실은 새로운 사랑으로 회복되며, 사랑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하는 차가운 먹이 사슬이 아닌, 하야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순환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순간이다.
삶을 살아가는 '어떻게'를 알게 된 후, 마히토는 이제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결심은 이제 확고하다. 이 모든 세계를 주관하는 큰할아버지 앞에서도 마히토는 흔들리지 않는다. 작은 입김 하나에도 곧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나무탑을 보며, 마히토는 그것은 생명이 담긴 '나무'가 아닌 죽음에 가까운 '무덤'과 같은 돌이라며 오히려 이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까지 한다.
마히토의 결심은 큰할아버지가 제안하는 이 세계의 순환을 거부하기까지 이른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 모두가 동등한 세상. 마히토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이다. 사실 그것이 정말로 실현 가능한 것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마히토의 선택에 담긴 그 '의지'다. 의지는 우리의 세상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의지들은 모여서 새로운 세상을 탄생해 내기도 한다.
잉꼬 왕으로 인해 큰할아버지의 세계는 결국 붕괴라는 결말을 맞이하지만, 이는 멸망이 아닌 새로운 세계의 탄생에 가깝다. 새로운 세상을 이어갈 새로운 세대, 폭력으로 이득을 취하는 아버지의 세계와는 다른 아들 마히코가 이어나갈 세계. 이는 구세대로서 미래 세대에게 남기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당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세계의 일은 차츰 잊어버릴 것'이라는 왜가리 남자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그가 말하는 이 세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영화에는 명백한 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82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한 노장의 연륜이 담긴 지혜로운 답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답하는 영화가 아닌, 묻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 그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당신들은, 그대들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