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리뷰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는 항상 ‘재앙’에서 출발한다. 이름도 모르던 남녀의 몸이 서로 뒤바뀌는 일상의 재앙부터, 쉽게 그치지 않을 기세로 쏟아지는 폭우 같은 천재까지. 그의 최근작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도 역시 이런 재앙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 규모의 차이는 작품마다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결국 이 모든 재앙들이 향하고 있는 지향점은 동일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재앙이란 한 마디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비일상적인 일’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이런 재앙을 통해 넘어지고 부딪히며, 마침내 시련을 이겨내고 한 층 더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난다. 때문에 그의 작품 속 재앙은 단순히 주인공을 괴롭히기만 하는 평면적인 역할이 아닌, 오히려 주인공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디딤돌 같은 입체적인 역할에 더 가깝다.
<스즈메의 문단속>에도 역시 이런 재앙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소녀 스즈메와, 미미즈라는 존재가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문을 닫아야 하는 소타. 이 둘은 미미즈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뜻하지 않은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재앙과 더불어,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미성숙한 인물이라는 이들의 페르소나 역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특징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난 작품들에서 봐왔던 익숙한 설정들이 눈에 띄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를 지난 작들의 특성을 그대로 답습한 작품이라고 속단하기엔 이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재앙의 대상이다. 재앙을 통해 성장하는 ‘개인’의 서사에 주로 집중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 재앙의 대상을 영화 속 인물들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일상을 향해 본격적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영화가 담고 있는 이런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미미즈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미미즈, 일본어로는 ‘지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영화 속 존재는 모든 자연재해의 원인이자 이 영화의 모든 사건들이 시작되는 시발점으로 그려진다. 한 가지 기묘한 점은 바로, 영화는 미미즈를 어떤 인격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미즈라는 재앙으로부터 인간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요석들은 분명한 무생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생명체로 그려지는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영화 또는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앙의 원인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재앙들을 주인공들이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절대적인 악의 축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마주한 이 재앙은 마치 우리가 주어진 삶을 살아가듯, 그 역시 자신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미즈라는 존재에 인격을 부여하고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아예 사람의 형체를 띄고 있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관객으로 하여금 재난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미미즈는 단순히 지진 같은 자연재해만 상징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며, 결코 피할 수 없는 재앙, 미미즈는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폐허’라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방치의 결과물에서 나타나는 미미즈의 특성 역시, 분명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함께 거하고 있지만 항상 관심을 갖고 바라보지는 않는 죽음을 향한 우리의 시각이 반영된 설정이기도 하다.
신카이 마코토는 미미즈라는 재난에 ‘죽음’이라는 상징성을 반영해, 이 이야기가 단순히 영화라는 비현실에서 머물지 않고 관객들의 입을 통해 우리의 현실에 나타나게 만든다. 그리고 과연 유약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 미미즈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오히려 관객의 의견을 되묻는다.
몇 대에 걸쳐 이 일을 평생동안 해왔다는 소타처럼, 사실 미미즈를 막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실의 재난, 그리고 죽음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또 영화를 본 우리에게 감독이 기대하고 있는 답은 그런 비관적인 것이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주인공 스즈메의 여정을 통해, 문을 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겪은 아픔을 과거로서 덮는다는 의미가 아닌 언제고 열어볼 수 있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슴속 어딘가에 응어리진 우리의 아픈 기억들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각자의 재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과거 또는 현재의 재난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안부를 묻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신카이 마코토만의 위로법이 빛나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