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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작가 Sep 14. 2021

스쳐 지나가는 사이

  우리는 계속 스쳐 지나간다.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소수다. 훨씬 많은 이들과 끊임없이 스쳐 지나간다. 이름값하는 장소에서는 유독 그 느낌이 극대화된다. 파리의 세느강 앞에서도, 뉴욕의 42번가 broadway에서도, 샌프란의 금문교에서도. 이런 곳에서 사진을 찍어주거나 부탁을 하는 일은 여행의 설렘을 더한다. 어쩌면 마지막 일 수도 있는 이곳에서,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이의 손길로 기억되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기도, 서로가 주인공인 극에서 기꺼이 엑스트라가 되어가며 살아간다.


  나와 이름이 같은 이가 잠깐 내 하루에 끼어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와 아는 사람이 내 일상에 살짝 그림자를 드리운 정도. 딱 그만큼 마주쳤다. 드문 이름은 아닌데, 같은 이름의 사람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런데 동명이인이 미국에 산다. 영문 표기법마저도 같다. 나와 이름을 공유하는 그녀. 흥미로웠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그녀를 만나 본 적도, 미국 어디에 사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나의 존재를 알고는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셨다. 한문으로 아름다운 글이라는 글자가 담겨 있는데,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인생을 한 편의 아름다운 글처럼 살아가라고 하셨다. 커서는 글을 쓸 때마다 괜히 이름을 한 번씩 떠올렸다. 이름 탓인지, 인문학을 하게 되어 정말 글을 읽고 쓰며 지내왔다. 글이 잘 안 써질 때면, 이름값도 못하네. 하는 생각도 해봤고, 어쩌다 마음에 쏙 드는 글이 나오면 이름에 어울리는 것 같아 뿌듯했다. 글이 잘 써지는 것과 상관없이, 내 이름이 나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 편의 잘 써진 글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아름답게 담겨있던데, 내 인생도 그렇게 잘 써지는 중인지도 생각해본다.


  그녀는 어떤 연유로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걸까. 이름 외 정보는 딱히 없지만, 그녀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손님들을 만나는지는 안다. 아 얼굴도 봤다. 당연하지만, 생긴 것도 이미지도 나와는 달랐다. 사진 한 장으로 본 그녀는 보헤미안스러웠다. 문신도 얼핏 보였고, 화장도 진했는데, 묘하게 중성적인 매력이 풍겼다. 우리는 이름만 똑같고, 비슷한 점은 하나도 없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 색은 달랐지만, 그녀가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사람인 것 같아 괜히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nail artist인 것 같다. 그녀에게 예약을 하려면 미리 선금 결제를 해야 되는 듯하고, 손님들의 만족도가 높은 문장들을 보니 손재주가 좋은 게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속눈썹 연장과 네일을 잘하는 것 같다.


  이걸 아는 까닭은, 그녀의 손님들이 몇 번이나 내 Venmo(카카오페이 같은 소액결제 수단)로 "Eyelash" 혹은 "Nail + lash" 이런 식으로 입금을 잘못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백인들이었다. 패리스 힐튼이 자주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여자가 내게 돈을 보낼 일이 도무지 없어서 입금되는 순간 안다. 또 실수했구나. 곧이어 메시지가 온다. 돈 돌려달라고. 몇 번 그랬기에 오늘도 내가 모르는 여자가 70불을 입금했을 때, 아 또 잘못 보냈구나 했다.


  오늘은 유독 짬이 없었다. 몇 시간 뒤에 확인해보니 메시지가 많이 와있었다. 그녀가 기억에 남는 건, 메시지를 많이 보냈기도 하고, 마침내는 "Please send back! I will tip! Thank you!"라고 써서 돈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돌려주면 tip을 주겠다고? 미국은 tip 문화가 생활의 일부라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아주 어색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재밌었다. 70불을 돌려주면 팁을 얼마를 주려고 그러나? 내가 안 돌려줄까 봐 초조해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얼른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하트와 함께 입금이 되고, 실수를 알아채고는 내게 70불을 청구했고, 내가 보낸 기록이다.



  그런데, 자기 전에 그녀에게 아무 연락이 없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걸 떠올렸다는 사실이 웃겼다. 속으로 tip을 원했던 거 아니야? 주면 얼마나 주는지 궁금했던 거 아니야? 아, 그건 맞다. 얼마 주려고? 하고 웃긴 했다. 그렇다고 바랬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분명 유쾌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 해놓고, 별 거 아닌 일을 되새긴다는 사실이 더 싫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Thanks! 한마디 했으면, 나도 No problem! 하고 기분 좋게 끝났을.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그런데 돈 받은 전후가 달라 씁쓸했던 거다.


  반대로, 고맙다는 말을 돌려줘야 하는데 당사자에게 할 기회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많은 커피 중독자들이 그러듯, 나도 에스프레소 머신과 드리퍼, 모카 팟 같은 것을 갖춰놓고 매일 커피를 내려마신다. 다행히 근처 맛있는 원두를 파는 곳도 많아서, 기분 따라 골라 내려마시는 건 찐행복이다. (이 동네는 acid한 약간 새콤한 원두가 대세다) 그날은 커피를 내릴 시간조차 없었다. 몸은 카페인을 너무 원하는 상태라 근처 커피집에 드라이브 쓰루로 한잔 사가기로 했다. 이런 날은 달달이다. 주문을 넣고, 차례를 기다려 계산을 하려는데, "You are all set. Enjoy your free coffee and have a lucky day!" 하는 거다. 아직 계산 안 했는데. 물어보니 앞 차를 가리키며 찡긋 웃는다. 아하! 그럼 나는 내 뒤차.라고 말하고 계산을 했다. 직원도 웃고, 나도 웃고. 아마 앞차도 뒤차도 웃었을 거다. 커피 한잔이 뭐라고, 우린 모두 행복했을 게 분명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 덕분에 카페인이 들어가기도 전에 온 몸의 피로가 다 풀렸다.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사이라면, 이왕이면 커피 릴레이로 만나는 것처럼. 그런 미소를 전하는 사람으로 살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이렇게 스치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태도가 그 사람의 진면목일 테다. 오늘 내게 70불을 돌려받아 안도했을 그녀가, 나와 같은 이름을 지닌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길. 나와 같은 이름으로 사는 그녀는 이왕이면 하는 일도 잘돼서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우린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연이지만. 그래도. 무려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사이 아닌가.


아 그리고, 앞으로는 꼭 본인의 Venmo 계정 뒤에는 _가 하나 더 붙었음을 고객들에게 잘 알려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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