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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작가 Oct 16. 2021

우리 집 담장이 뚫렸다

연결과 단절. 그 사이 어딘가

  우리는 그런 사이다. 얼굴보다는 서로의 목소리에 더 익숙하고, 가족 구성원도 알고, 생활 패턴도 조금은 알고, 나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이. 서너 번 아이가 야드에서 놀다가 종이비행기를 넘기거나, 장난감 널프건을 쏘다 넘겼다. 어김없이 다음날이면 다시 우리 잔디 위에 돌아와 있다. 별거 아닌 종이비행기 따위 무심코 치워버릴 수도 있을 텐데, 아이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것 같아 고맙다. 당연 아이가 제일 좋아한다. "종이비행기야, 잘 다녀왔어?" 하며 신이 나서 "엄마, 다음엔 종이에 편지를 쓴 다음에 비행기를 접어서 날려볼까?" 한다. 재밌는 생각이지만, 그건 아니야.


  가끔은 협업도 한다. 내가 사는 곳은 건조하다. 처음 이 동네 왔을 때, 30년을 사셨다는 분이 그러셨다. 한국에서 듣던 빗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워 앱으로 들으면서 주무신다고. 외국 살이에 가족이, 음식이, 관공서에 갈 때마다 한국의 빠른 속도가... 수많은 것들이 그립다고 들었는데, 빗소리까지 그립다니. 한 해, 두 해. 시간은 오늘도 차곡차곡 흘러,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제법 영글은 표정으로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 되니,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다. 가을. 특히 이 맘 때는 더 건조해서 지난 몇 년간 산불로 신경을 곤두세웠던 우리는 비를 그렇게 기다린다. 물을 아껴야 하는 터라 잔디마저도 바싹 마르기 쉬워, 이러다 죽어버릴 것 같으면 따로 물을 챙겨준다. 빗소리가 어땠더라... 물을 주고 있노라면, 담장 너머로 인사가 건너온다. "Hello!" 요새 마당이 안녕한지도 물어온다. 너구리가 밤마다 찾아온다고, 혹시 우리 쪽에 굴 같은 거 있는지, 혹은 요새 벌이 자주 출몰하는데 이쪽에서 벌집이 보이는지 확인해 달라고 물으신다. 그러니까 옆집이나 앞집이라면 오가며 만날 텐데, 뒷집이다. 그것도 길이 희한하게 나 있어 바로 뒷길 아니고 빙 돌아야 한다. 드나드는 문이 다른 street이니 마주친 적은 없고, 이렇게 담장 끼고 대화를 한다. 이번 주말에는 아들네가 와서 바베큐를 하시네. 저 사과나무는 결국 잘라내기로 하셨구나. 더 이상 다람쥐가 그 나무 사과를 따서 먹다 우리 야드에 버려두고 간 것 치우는 일은 없겠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활을 적당히 공유하며, 옆에 있는 공기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펜스 부분 교체 공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 집 쪽 라인 중 해당되는 몇 집이 하기로 했고, 집이 시끄러울게 뻔해 나가 있었다. 점심 지나 들어와도 한창이더니 드디어 조용해졌다. 식사하러 가셨는지 아무도 없고 담장 한 부분이 뚫려있었다. 사람 한 명쯤 다닐만한 작은 틈이 생긴 거다. 신기했다. 항상 막혀있는 곳이 가림막이 없어져 그 틈으로 저편이 보이니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 같기도, 없던 길이 생긴 것 같다.


  큰 아이가 한창 판타지 책들에 꽂힌 시기라 그런지, 뚫린 담장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의 루시가 발견한 옷장 같기도, J.K. 롤링의 <해리 포터>의 킹스 크로스 역 9와 3/4 승강장 같기도 하다. 두 곳 모두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이 만나는, 현실과 작가가 안내하는 상상력의 세계가 교차되는 지점이다. 지금이야 책과 영화의 유명세에 따라 익숙해져 버렸지만, 사람들이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을 마법의 통로로 설정한 롤링의 과감함이 신선하다. 뻔뻔할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존재하는 킹스 크로스 역 9와 10 승강장 사이 마법의 문. 머글(일반인)들은 모르는 저 문을 달려서 통과하면 호그와트로 간다. 주인공도 처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으로 돌진할 때는 용기가 필요했다.


호그와트행 급행열차는 킹스 크로스 역 9와 3/4지점입니다.



  나니아의 옷장 이쪽에는 누군가의 것인지도 모를 털옷들이 잔뜩 걸려 있는 반면, 옷장 저편으로 나서면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설경이 펼쳐진다. (나는 이런 곳에서도 살았는데, 정말 눈이 허벅지까지 쌓이고 침엽수들의 나뭇가지에 눈이 쌓여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일 때면, 지긋지긋한 눈을 치우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금 이건 영화 속 한 장면이라며.) 가장 어린 루시가 숨바꼭질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옷장 너머의 공간. 처음에는 루시 혼자 발견했고, 결국은 세 명의 언니 오빠 모두 가본다. 쿵쾅거리는 소리와 서로 밀지 말라는 작은 소란 후에 만나는 하얗고 조용한 마법이 걸린 세상 나니아. 전쟁과 공습으로 묘사되는 현실 세계와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인, 아슬란을 만날 수 있는 C.S. 루이스의 창조 공간을 이어주는 곳. 이렇듯 문은 서로 다른 장소를 이어주며, 우리를 새로운 공간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숨바꼭질하는 루시가 처음으로 나니아를 발견하는 장면. 이편에는 눈에 덮힌 나뭇가지가, 루시 뒤편으로는 털옷이 걸려있다.



  우리에게도 없던 문이 생겼다. 웅장한 호그와트 대신, 나니아의 숨 막히는 설경 대신, 담벼락 저쪽으로는 뒷집 할머니 할아버지의 소박하고 정겨운 일상이 펼쳐졌다. 한쪽에 꽃도 심어놓으셨고, 그 옆에는 채소도 자라고 있는 걸 보니, 얼마 전 아이와 같이 읽은 <비밀의 화원> 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이와 내가 자주 앉아있던 곳 바로 옆 담벼락 아래 이런 식물이 자라고 있었구나. 별거 아닌 게 아기자기하기도, 미처 정리가 안 된 채 누워있는 삽과 구석에 놓인 비료 봉투마저도 정겹다. 마침 뚫린 이 마법의 문으로, 어제 Farmer's maket에서 사 온 자두와 귤을 한 바구니 건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레터를 쓴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대신, Thank you를 직접 전하라고 하면 좋겠다. 평소 들락거릴 수 없는 곳으로 아이가 과일을 들고 나타나면, 그게 마법이지.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또 이런 문은 지름길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어릴 때 동네에 개구멍이 있었다. 모두 그리 불렀다. 당연히 '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고, 나무 수풀 우거진 사이에 있던 꽤나 큰 구멍. 냇가나 개울이 있는 멋진 시골집 울타리 밑이라면 모를까, 빽빽한 아파트촌에 개구멍이라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고, 우리는 그곳을 재밌어했다. 수업 후, 같은 방향 아이들과 "우리 글로 갈까?"라고 은밀하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도 재밌었다. 마치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 공간을 드나드는 것 같았다. 그 개구멍이 없으면 학교에서 집으로 십여분을 돌아서 와야 하는데, 지름길이 되어주어 좋았다. 생각해보라. 초등학생 걸음을 십여분이나 단축시켜 주니 그 역시 마법이 맞았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쏙. 쏙. 한 명씩 차례로 수풀을 지나 어른 허리 정도 높이의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짜릿했다. 지금 생각하니 계속 수풀이 자랐을 텐데, 일 년 내내 같은 크기의 구멍이었던 게 누가 관리해놓았던 것 같다. 누구였을까. 살다 보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 덕분에 도움을 얻을 때가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손길이 마법이었구나.


  그 개구멍(보다야 컸지만) 같은 틈이 생겼다. 저 틈 때문에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도 떠올랐고, 과일도 전해드려야 하고. 마음이 바빠졌다. 브라운 백에 과일을 담아두고는, 빠른 걸음으로 아이를 데리러 갔다.


잠깐 생겼던, 우리 집과 뒷집 사이의 9과 3/4 지점.


 그런데, 일하시는 분들이 능력도 좋으시다. 돌아오니 그 짧은 시간에 그쪽 담장 일을 끝내셨고, 그 틈도 다시 막혔다. 잠깐 열렸던 마법의 문이 닫힌 기분이 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 아이에게도 말해주어서 기대가 대단했는데, 아이도 실망이다. 다시 부셔달라고 부탁을 하잰다. 워워.


  잠깐만 열렸던 뒷집과의 담장처럼.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타이밍을 맞추면 꼭 들어맞는 맞춤옷을 입은 듯이 좋은데, 그 순간을 놓치면 어색하게 사이즈 안 맞는 옷을 걸친 느낌일 때가 있다. 고맙다는 인사 역시 그렇다. 꼭 맞는 시간에 인사를 건네면 받는 쪽에서도 기분 좋고 모든 것이 부드럽게 흘러가는데, 그놈의 타이밍을 놓치면 어색해서 머쓱해지기도 한다. 이번은 문이 닫혀버려서, 약간 곤란해졌다. 뒷길도 아닌 길을 굳이 둘러가서 불쑥 과일을 내미는 것도 어색한 일이 되어버렸다. 담장 틈이 열렸을 때는, 너무 재밌는 핑곗거리였는데.


  좀 아쉽지만. 기회는 또 오는 법. 아쉬워하는 아이도 달래 과일을 깎아주고, 잠깐 설렜던 마음도 잘 다듬어 글에 담고. 다음에 또 재밌는 기회를 노려보겠다. 뒷집 할머니 할아버지. 딱 기다리고 계시길!


2021.10.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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