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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작가 Dec 02. 2021

시간도 느리게 흐르던 곳

미국 시골 생활

   첫째 아이가 한창 걷고 뛰고 말 배우던 그때. 우리는 시골에 살고 있었다. 한국을 나오려면, 작은 비행기를 타고 대도시로 가거나 차로 네다섯 시간쯤 운전을 해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곳. 경유를 하는데 비행기 연착이라도 있으면, 내 집 문 열고 서울 부모님 댁 문을 열기까지 24시간도 걸렸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대도시에서만 살았으니 복닥복닥한 곳만 알다, 허허벌판 같은 자연 속에 덩그러니 있으려니 황망했다.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문제는 어딜 가나 그뿐이었다. 이 세상에 재미진게 얼마나 많은데. 애초 비교대상이 대도시니 문화 시설도, 뮤지움도, 쇼핑몰도 다 시시했고, 한국 음식점도 제대로 된 곳 없고, 어느 크리스마스에는 허벅지까지 쌓인 눈에 고립되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답답한 데 어떻게 사는 거지 하며 입이 이만큼 나왔다가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쏟아질 것 같은 별빛이 너무 예뻐서, 걸어가면 깜박깜박거리며 나를 쫓아 뛰 댕기는 반딧불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강가의 오리 새끼들이 매주 쑥쑥 커가는 게 기특해서. 그렇게 자연 속에 폭 파묻혀 살았다. 밤에 문 열고 나오면 차가운 공기와 어우러진 흙내음이 달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맑은 공기는 시원해지면 더 맛있었다.


  

  나는 휴학을 하고 아이랑 하루 종일 보냈다. 남편이 바쁠 때는 그 너른 땅에 우리 둘 뿐이었다. 나의 하루는 아이로 가득 찼고, 아이에게 나는 세상의 전부였다. 가끔은, 그게 부담스러웠다. 집에서 숲으로 걸어가며 줍는 단풍잎, 솔방울, 도토리가 아이의 장난감이 되었다. 집 근처 호수에 오리 부부는 새끼를 7마리 낳았는데, 갈 때마다 쑥쑥 잘도 컸다. 아이는 자꾸 오리 보러 가자고 졸랐다. 유모차도 못 들어가는 울퉁불퉁 오솔길을 애를 데리고 가자니 더 멀게 느껴졌다. 어른 한 명 걸어갈 틈만 두고, 억새풀 같은 것들이 빽빽이 호위하는 길에 아이를 걸리자면, 세월도 그 길 위에 걸려 있었다. 느릿느릿 아이 걸음 하나에 하늘 한번 보고. 조심조심 아이 걸음 하나에 호숫가를 눈에 담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도, 누가 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구름 조각처럼 핀 하얀 목화솜도 신기했다. 아이가 "꽥꽥, 커." 하면, 나는 "응, 그래 오리들이 그새 또 컸네." 했다. 분명 7마리였는데, 어느 날부터 한 마리가 안 보이자 괜히 나도 슬퍼졌다. 아이가 아직 수를 세지 못해 다행이었다.


  온 세상 조용한 호숫가에 아이와 나. 새끼 한 마리를 잃은 오리 가족. 아름답고 외로웠다. 나는 이 아이의 전부이니 외로움은 감췄다. 씩씩한 목소리와 밝은 표정을 지어도, 석양이 만드는 그림자까지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외로운 그림자가 따라 붙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림자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아이는 "모야?"했다. 아이가 이리저리 도망가면, 그림자는 요리조리 따라왔다. "저리 가!" 결국 아이는 화가 났다. “이건 그림자야. 해님이 있으면 항상 민이를 따라다녀. 민이가 좋아서 그래."라고 하면, 아이는 가만 서서, "민이 조아?" 하고서는 천천히 그림자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좌) 아이가 처음으로 주웠던 단풍잎. 책 사이에 말려두었다./(중) 우리 쉬었다 가자. /(우) 그림자가 계속 따라다녀서 심기가 불편했던 아이.


  어느 날은 개미였다. 아이는 "애미! 애미!"라고 소리를 지르며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는 것처럼 신나 했다. 나는 쬐끔한 개미 따위를 찾느라 눈도 허리도 아팠지만, 아이의 웃음을 음악 삼아 같이 "응, 개미, 개미" 했다. 개미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항상 많아서 다행이었다. 집 근처 숲길 근처에 누군가가 생감자를 버려뒀다. 다음 날에는 어떤 동물이 와서 파먹었고, 썩는 줄만 알았는데 며칠 뒤에는 싹을 틔웠다. 우리는 매일 거길 지나다니면서 감자가 싹이 자라고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심심하지만 꾸준히, 그렇게 같이 자랐다.


  근사한 쇼핑몰 하나 없었지만, 즐겨가는 곳도 생겼다. 뉴욕의 브런치 가게를 모토로 삼은 듯한 작은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는데, 신기하게 이 작은 시골마을에 숨겨진 멋쟁이들은 다 거기로 모였다. 문만 열면, 빠리지엥 같은 사장님 가족들이, 뉴요커들이 좋아할 만한 인테리어를 해놓고 반겨주었다. 우리 셋이 등장하면, 아이를 예뻐해 줘서 좋았다. 아는 이 적은 시골살이에 그게 정이라고 따뜻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Farmer's Market을 갔다. 여름에 자주 열렸는데, 시골 사는 우리 가족에게는 최고의 유흥지였다. 음악이 라이브로 연주되고, 이동용 화덕이 피자를 구워냈고, 온갖 치즈, 와인, 빵, 로컬 꿀, 농부들이 직접 키운 채소는 물론, 각종 음식점들도 다 동원되었다. 재밌는 알들도 많았다. 푸른빛이 도는 달걀도, 메추리 알도 오리알도 있었다. 근처 마을에 흩어져 살던 예술가들도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림도, 귀걸이도, 반지도, 수제비누, 금속이나 나무 공예품도 팔았다.


  아이는 이곳에서도 오리 떼를 좋아했다. 이쪽 오리들은 눈치가 보통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강가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쪼르륵 왔다. 빵조각을 던져주면 푸드덕 난리가 났다. 거기에도 서열이 존재했다. 가장 힘센 애가 사납게 푸드덕거리면 다른 애들은 근처에 오지도 못했다. 가만 보면 항상 먹는 몇몇만 먹었다. 아이는 이 장면에 화를 낼 만큼 자랐다. "쟤가 또 먹네! 골고루 나노 먹어야지!" 하며 멀리 있는 작은 오리들한테 힘껏 던졌다. 아이 팔힘에 쪼꼼 날아가다 톡. 앞에 떨어지니 아까 먹던 걔가 와서 또 먹었다. 아빠가 나설 차례다. 휘이익! 구경꾼이던 저쪽 작은 오리들에게 기회가 왔다. 아이는 이 순간을 가장 환호했다. 아이의 열화와 같은 응원 덕에 아빠는 예상에 없던 팔운동과 오리 세계의 정의를 구현했다. 처음에 이사 왔을 때는, 촌스러워서 절대 안 살 것 같았던 등에 동네 이름이 써진, 투박한 손염색 나염 티를 사서 아이를 입혔다. 영락없는 '시골아'가 거기 있었다. 사랑스러웠다. 가끔은 나를 위해 꽃을 한 다발 샀다. 물을 잘 갈아주면, 일주일의 행복이 식탁 위에 폈다.


 여기에서도 오리가 젤 재밌어./ 그 손염색 티. 나름 이곳 인기템이라 다운타운가면 여럿 마주친다.

 

 후에 아이도, 엄마도 잘 맞는 친구를 만나 하루가 멀다 하게 집을 드나들며 친하게 지내 다행이었고, 몇몇 소중한 인연들이 남았지만, 어쩐지 그곳에서는 늘 마음 한켠이 쓸쓸했다. 어서 '현실'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었다. 드디어 해야 할 일이 끝났을 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원한 마음으로 이사를 나왔다. 그런데 아이가 자꾸 어렸을 때 살았던 곳 이야기를 한다. 지금 사는 곳은 눈이 안 내려서, 아이는 뻔히 대답을 알면서도 재차 묻는다. "엄마, 거긴 눈이 왔지. 나도 눈 가지고 놀았었지?" "그러엄. 너는 눈 위에서 아장아장 걸으며 컸지." 나에게는 지긋지긋했던 곳인데, 아이에게는 추억 깃든 고향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사진을 붙여 자기소개를 쓰는 star of the week 같은 project 때마다 그곳이 소환된다.


  아이 때문에 사진을 들쳐보니, 우리의 외로움 곁에 희미한 행복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우리 셋이 똘똘 뭉쳐서 다녔던 시간. 외롭고 외딴곳이었는데, 다시 보니 내 아이를 자연에서 자라게 해 준,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는 행복을 지닌 시간이 거기 있었다.



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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