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어, 송태섭!" 이 남긴 희열
며칠 전에 슬램덩크를 한번 더 봤다. 영화관에 간다고 하니 후배가 “말로만 듣던 슬램덩크 N회차 관람자를 여기서 보네요.” 하더라. 앞으로 한 두 번만 더 보려고 한다. 자막으로만 두 번 봤으니 이제 더빙으로 한 두 번만 더 보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극장 안을 쓰윽 보니 역시 3-40대로 보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다들 무엇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아온 것일까.
극장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만나는 건 아마도 그때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일 거다. 원치 않게 어른이 되고 더는 젊지만은 않은 내가 그 시절의 나와 조우한다. 그런데 스크린 속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늙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정면돌파를 선택하며 꿈을 믿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향해 돌진한다. 조금 다치더라도 '지금 이 영광의 순간'을 위해 몸을 내던지길 주저하지 않는다. 믿으니까. 그 순간이 인생에서 빛나는 시절임을 의심하지 않으니까. 다쳐도 이겨낼 거란, 성장통일 거란 믿음이 있으니까.
관객은 그런 믿음에 기대며 한창 자라나던 시절의 자기 자신을 만난다. 철들기 전에 현실이라는 무게를 온몸으로 이겨내기 전에 내가 믿던 것들. 다 자란 나는 어린 나에게 말한다. 그렇게 살면 상처만 받아. 더 빨리 깨달아야 손해를 덜 봐. 꿈은 없는 게 제일 좋지만 어쩔 수 없다면 현실적인 걸로 꾸렴. 뭐든 적당히 좋아해야 해. 그 어떤 것도 너를 뒤흔들지 못하게 해. 나는 그 시절의 나의 믿음을 지켜주고 싶다. 지켜주고 싶어서 더 차갑게 말한다.
소년과 소녀는 자라났다. 현명해졌다. 펑펑 눈물 흘리는 정면돌파보다는 그나마 약간의 미소라도 머금을 수 있는 측면돌파를 선택한다. 가장 덜 다치고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순수하게 자기 마음을 따라 좋아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자격을 얻은 이들뿐임을 아니까.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져도 되는 이들. 마음껏 방황할 수 있는 권리를 생득한 이들. 혹은 후천적으로 아주 운이 좋은 이들. 그렇지 못한 나머지 이들에겐 정확한 현실 인식이 답이라는 걸 아니까. 약간의 체념과 비겁함이 나를 지키는 수단이 된다는 진실을 배웠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처음에 슬램덩크를 보러 극장으로 가는 길은 약간 시큰둥했다. 성장 서사는 이제 지겨워. 유치해... 다 거짓말이야.
그런데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나는 겁니다.”라는 대사를 들었을 때 울컥하고 가슴에 뭔가가 올라왔다. 그래, 저런 이야기에 기대어 힘든 시간들을 버텼었지.. 싶어서. 분명히 힘이 됐었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이는 말이다,라는 유치한 문장들이. 열심히 하면 꼭 잘 된다거나 하는 건 이제 비현실적인 마법 같은 믿음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포기한다는 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성공인가? 아니다. '포기한다'의 반대말은 오직 '포기하지 않는다' 뿐이다. 포기는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즉 포기라는 말은 어떤 결과를 평가할 때 쓰여야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나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내 마음 가짐의 자세일 뿐이다. 다만 저 대사처럼 포기하는 순간 경기는 끝난다. 선택의 주체인 내가 그만두기를 택한 것이므로.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그냥 상황 종료. 끝난다. 아무리 포기하지 않아 봐야 그 어떤 성공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믿음은 정말 나를 배신했을까?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다고 내 선택의 가치마저 바닥에 팽개쳐버린 건 내가 아닐까.
"어머니께.
항상 문제만 일으키고 폐 끼쳐서 죄송해요.
제가 농구하는 거 싫어하셨죠. 형이 생각나니까.
그래도 농구 그만두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초등학교 때 경기 보러 와줘서 감사했어요.
형이 없는 세상에서 제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건 농구뿐이었어요.
계속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
농구 계속하길 잘한 것 같아요.
형이 서고 싶다던 자리에 내일, 제가 서게 됐습니다."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중에서, 송태섭
"뚫어, 송태섭!"이라는 한나의 말과 함께 상대인 산왕의 존프레스를 뚫은 송태섭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건 그래서일지 모른다. 송태섭은 천재도 아니고 농구하기에 유리한 신체적 조건을 타고나지도 않았다. 더구나 형 대신에 살아남은 게 자기여서 미안하다는 죄책감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인물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과 싸운다.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마주하는 건 자신의 약함이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다. 내다 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나. 그런데 그 순간에 송태섭은 그 자기 자신을 뚫어버리는 거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강한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이대로 그만 멈추고 싶은 마음. 주변의 기대. 그 모든 것들을 돌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송태섭이어야만 한다. 강백호도 서태웅도 아닌 송태섭.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일뿐이다. 압박 수비를 제대로 뚫어내진 못하더라도. 결점까지가, 약함까지가 나다. 그 사람이다. 그 결점을 잘 데리고 살아가는 것 까지가 진짜 삶이 아닐까. 포기하지 않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슬램덩크를 보는 내내 어린 시절의 나는 계속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네가 살면서 배운 걸 나에게 알려달라고. 뭘 믿고 걸어가야 하냐고. 나는 대답한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그래도 포기하면 끝이니까... 까지 생각하다 얼버무린다. 그 이상은 모르겠으니까. 어려우니까.
앞으로 현실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잃어버렸던 무엇들에 다시 조금씩 눈을 돌려볼 생각이다. 쓸데없지만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 슬램덩크도 앞으로 몇 번쯤 더 보겠지. 어두운 극장 안에서 지금 이 시간을 흘려보내야지. 눈물이 나면 흘려야지. 꿈이 있던 나도, 꿈을 잃어가는 나도 양 옆에 끼고 봐야지. 포기하고 싶은 나도, 이미 포기한 나도 옆에 같이 앉혀두고.
성장 서사만큼 유치하고 비현실적인 게 없다.
성장 서사만큼 아직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