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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Feb 19. 2023

슬픔이 없는 십오 초

그 찰나의 빛에 기대서 어둠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요즘.

한동안 도망가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거리를 걷다가도 자꾸 눈물이 나서 걸음을 멈췄다.

눈물이 흘러서 다른 이의 시선을 마주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나 돼서야 

새삼 거리에 있다는 걸 깨닫곤 했다.


수면 아래 머물러 있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고

오직 생존을 위해 숨을 몰아쉬고 

다시 침잠하는  같은 나날들이었다.

힘들  몸을 웅크리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최선이라는  

이미 오래전에 배웠다.


겨우 걸어오던 내 삶의 길이,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나날들이었다.

무가치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 당연히 죗값을 치르듯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연스러웠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휘어지는 길들을

그저 바라보는 게 최선인 나날들이었다.

그 길로 뛰어들었다간 

영영 공중분해될 것 같았으니까.

숨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나는 도망치는 인간은 되지 못했다.


대신   없는 듯이 아주 착실하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곳에 

적어도 나는 존재하고는 있었다.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뜨고, 비슷한 시간에 

눈을 감았다. 잠들진 못했지만.

매일 가는 카페에서 언제나처럼 

 마시는 커피를 주문해서 마셨다.

넷플릭스에 업데이트되는 신작들을 살펴보고

새롭게 나오는 노래들을 들었다.

뉴스를 보고 비극적인 사건에 가슴 아파했다.

뉴스에서 읽히는 사람들의 인생사에 

 하루를 투영해 보며 억지 위안으로 삼았다.


침잠하는 나날속에서

잠깐씩 위안 같은 사람과 만남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겨우 문을 열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껴주고 걱정해 주는 

얼굴들이 거기  있었다.

날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얼굴들이.

그럴 때, 아마도 십오 초 즈음일까.

찰나의 시간 동안 진심으로 웃고 있었던 것 같다.

가만히 햇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익숙한 그늘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당사자인 나에게 가장  부담이었다.  

걱정해주는 다른 이의 얼굴들도 때론 부담이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상처를 헤집고 싶지 않았다.

모두 그냥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직  잘못만 생각하고 반성하기로 했다.

기도했다.

그리고 십오 초보다는 조금  웃을  있게  

지금까지 왔다.

시간은 정말 흘렀다.


문득 이 시가 떠올라 읽다보니 밤바다가 기억났다.

가장 친한 친구 J 함께 떠났던 속초 밤바다에 

다시 가고 싶다.

그때  백수였고, 되는  하나 없었으며 

세상에겐 계속 발로 차이고 있었고 

집도 더는 쉴 곳이 아니게 되었지만.


J와 닭강정 박스를 고이 들고 찾았던 그날 밤바다는 참 따뜻했었다.

우리는 처음 듣는 노래들을 같이 들었고 

서로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삶은 여전히 엉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쉽게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것도 예견했지만 

그날의 바다를, 달빛을 바라보는 동안엔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었다.


그게 십오 , 정도의 위안이었을까.


시는 끝까지 어둠을 말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라고

모두  사라지는 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나아질 거라고.

배우고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던 거라고.

지금 내가 빠져있는  어둠 속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그러니 기도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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