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끔 Dec 15. 2022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이 많이 내린 오늘.

문득 이 시가 생각나 꺼내어 읽어보았다.

지나치다, 라는 말의 속성은 넘기는 .

머무르지 않는 것인데.

'기억할 만한'..이라는 단서를 붙이게 되는 

지나침이란 무엇일까.

지나침과 마주침의 차이는 무엇일까.

누군가가 그랬다.

존재의 동요가 있어야 마주침이라고.


지나침에도 불구하고, 동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일까.

화자는 멀리서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눈이 그치듯, 울음이 그칠 때까지 바라볼 뿐이다.

화자는 아무것도 건네지 못한다.

그저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며 바라본다.

그러다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눈이 퍼붓는 어느 날 다시 그를 떠올린다.

멀리서 보면 지나침이지만 

분명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다.

울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화자의 마음속에 

동요가 있었으니까.


바라보는 사람, 목격자.. 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운명과 우연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일까,

그저 반복되는  우연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기억하게 된다면

그건 지나침일까, 마주침일까.


 버거가 그랬듯이 

우리는 항상 사물과 나와의 관계 본다.

사물 그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화자가 목격한 건 정말 울고 있는 서기였을까.

사실 그는 울고 있는 서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는 듯이 웃고 있던 청소부였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곳에 울고 있는 서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유리창 너머에서 울고 있던 사내는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의 눈에서 슬픔이 보인다면 

그가 슬픈 것일까,

아니면 내가 슬픈 것일까.

눈이 퍼붓는 동안 단독으로 마주하게  

누군가의 모습 .

마치  세상에 그와   뿐인  같은 

고요한 세상 속에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은 그의 슬픔인가,

아니면 나의 슬픔인가.


오늘도 나는 사물과 나와의 관계를 본다.

내가 그를 통해 나를 보는 것인지,

내가 정말로 그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구원해줄 또 다른 내가 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