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킬미, 힐미> 나는 '내가 아는 나'들의 총합보다 크다
왓챠로 다시 본
드라마 <킬미,힐미> 속 장면 셋
장면 1.
차도현: 어쩌면, 세기가 저보다 유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실장: 무엇보다 든든한 뒷배가 있는 사람은 늘 든든하고 자신감 넘치는 법이니까요.
차도현: 세기가 뒷배가 있습니까?
안실장: 부사장님이 뒷배 아닙니까. 뒷수습은 늘 알아서 처리해줄 거라 믿으니까. 늘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신세기와 차도현은 한 사람이니까, 그럼.... 자기 자신을 믿은 게 되나.
장면 2.
오리진: 신군,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가 가진 상처 말이야... 이제, 차군과 조금만 나눠가지면 안 될까? 너 혼자 짊어진 어릴 적 기억... 이제 차군에게도 나눠주면 안 되겠냐고.
신세기: 기억을 나누라고? 그 약해빠진 새끼랑?
오리진: 약하지 않아. 차군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해. 너와 다른 인격들은 책임을 져야 할 순간에 사라지지만, 차군은 책임을 져야 할 순간에 나타나 묵묵히 뒷일을 감당하고 수습해. 그게 바로 차군이 강하다는 증거야. 그러니까 이제 조금만 나눠가지면 안 될까.
장면 3
차도현: 너도 같이 살아가는 거야, 내 안에서. 몸과 시간만 내 것일 뿐이지. 필요하면 부를게. 도와줘.
신세기: 어이 차군, 명심해. 네가 또다시 세상에 겁을 먹거나 나약하게 굴면 그때 내가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잘 살아가는 게 좋을 거야.
차도현: 잘 가.
신세기: 잘 살아.
차도현: 어이 신군, 너는... 나야.
신세기: 나는,… 너지.
드라마 <킬미힐미> 중에서
내가 아는 나의 총합이 정말 나의 전부일까.
2015년에 방영된 드라마. 개인적으로는 배우 지성의 최고작으로 꼽는 드라마이며, 그의 작품 중 내게 가장 큰 울림을 남겼던 드라마다.
지성이 분한 '차도현'은 무려 일곱 개의 인격을 가진 부사장, 재벌 3세다. 가장 중요한 인격으로, 도현과 동갑이며 가장 먼저 생긴 인격인 '신세기'를 비롯해 어린 여자아이, 10대 쌍둥이 남매, 원양어선을 탔던 40대 남자 등등 모두 일곱 개의 인격이 주인공 차도현의 몸에 살고 있다.
신세기는 차도현의 어린 시절에 탄생된 인격이다. 어린 도현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탄생시킨, 고통을 대리 감내하는 인격인 것이다. '쎈캐' 신세기는 차도현을 대신해 그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대신 처리한다. 센 만큼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기도 한 신세기는 늘 사고를 치고 사라진다. 물론 그 뒷수습을 떠맡는 건 ‘본캐’, 언제나 차도현이다.
그런데 말이다. 늘 사고만 칠 것 같은 신세기는 의외로 유능한 면모를 보인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추진력으로 차도현이 해결 못하는 문제를 척척 해결해내곤 사라진다. <장면 1>에서 차도현이 '세기가 나보다 유능할지도 모른다'라고 자조하는 것은 그 때문. 그러자 차도현의 오른팔이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회사 사람인 비서실장이 말한다. 신세기는 차도현이 뒷수습을 해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는 거라고. 차도현을 든든한 뒷배로 여기기에 믿고 추진력을 가질 수 있는 거라고.
또 다른 내가 있기에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내일 일은 생각 않고 마음껏 놀던 주인공이 다음 날 '어제의 나야 왜 그랬니'... 하며 뒷수습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떠넘기고 오늘을 즐긴다는 것. 사실, 나만 해도 자주 마치지 못한 일을 덮으며 내일의 나에게 미루곤 한다. 지금의 나는 감당할 수 없지만 내일의 나, 미지의 나는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못 믿을만한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이 드라마는 나라는 사람이 '내가 아는 나'들의 총합보다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가 아는 나는, 내가 아는 나의 총합은, 진짜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흔이 다 돼가는 나이에 돌아보니, 견뎌야 하는 시절이란 게 있는 것 같다. 특히 어릴 때는 겨울이 겨울인지도 모르면서 견뎌야 한다. 그 시절에 목격한 약하디 약한 나는 내 안에 쌓여간다. 무시당하는 나, 버림받는 나, 스스로 보면서도 싫어지는 나, 수없이 많은, 버리고 싶은 나... 그런 '나'들은 내 안에서 검은 막 하나가 씌워진 채 방치당하기 일쑤다. 그 모두가 나이지만, 그걸 감당하거나 안아주거나 이겨낼 힘이 없는 현재의 나는 외면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모두는 너무 중요한 상처의 기억들이다. 피할수록 더 견고한 나의 일부가 되고 나를 방해하고 괴롭힌다. 내가 아는 나는 그렇게 문득 문득 수면 위로 올라와 수면 아래로 나를 끌고 내려간다.
그럴 때, 차도현에게 신세기가 그렇듯, 신세기에게 차도현이 그렇듯, 또 다른 내가 있을 것임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보는 내가 전부는 아니다. 달에게 뒷면이 있듯 내가 모르는 강하고 현명한 내가, 그 약하디 약한 나들을 안아줄 수 있는 내가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 일말의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말자고, 드라마를 보며 스스로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 이게 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누구도 내가 바라보는 그가 전부는 아니다. 그에게도 달의 이면 같은 또 다른 모습들이 있을 것이다. 차도현의 뒤에 신세기가, 요나가, 페리 박이, 나나가, 요섭이 있고 그 모두가 결국 차도현 한 사람이듯이.. 그러니 내가 보는 몇 장면을 가지고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남이 나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는 내 모습, 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극히 제한된 경험으로 도출된 결과일 뿐이다. 그와 나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해하면 된다. 누군가에게 나의 그런 면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일부일 뿐이다. 모두가 멀리서 보면 다중인격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믿어보자. 나를 살리는 내가 있을 거리고.
나를 믿는다는 말은 현재의 내 모습이 만족스럽거나 완벽해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걸, 내가 아는 형편없는 내가 전부가 아닐 것임을 믿는 것이다. 긴 터널을 지나며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나를 조각내고, 내가 보는 누군가들을 조각내고 그 조각낸 이미지들의 합을 나라고 믿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 오해의 끝에서 스스로의 무가치함에 고통받고 절망하고 있다면.
믿어보자. 내가 아는 내가 전부는 아닐 거라고.
우선 시작은... 거기부터다.
어떤 가능성도 무시하지 않는 것.
희망의 시작은 거기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