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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Mar 05. 2023

"착하다."

나의 아저씨 - 지안이 동훈을 사랑하게 된 순간

S#42 - 지안 집 앞 (밤)


나와 서는 동훈. 따라 나와 문간에 서는 지안. 서로 말없이 데면데면. 동훈은 주저주저하다가...


동훈        착하다...

지안        !

동훈        ...

지안        !

동훈       (돌아서며) 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훈...

그대로 서 있는 지안...


/ 5화 중에서



사는 게 지칠 때마다 찾게 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요즘 틈틈이 다시 보고 있다. 각본집도 샀는데 처음부터 다 읽어보진 못하고 기억나는 장면 위주로 찾아서 읽고 있다. 많은 씬들을 좋아하지만 딱 하나를 꼽으라면 이 장면이다.


이 장면이 나오기까지의 상황을 보면..


지안은 집에서 아픈 할머니를 돌보고 있다. 늦은 저녁, 지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방. 할머니는 평소와 달리 창문 가까이에 누워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지안은 할머니가 추울까 봐 창문에서 먼 곳으로 급히 요를 끌어낸다. 추운데 왜 거기 가있냐는 지안의 질문에, 할머니는 달이 보일까 싶어서 가있었다고 대답한다. 달을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 보통 이런 경우라면 그냥 달이 안 보이네, 서로 그러고 말았을 것인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지안은 마트에서 기계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담는다. 사실 마트 쇼핑은 카트를 훔치기 위한 것. 훔친 카트를 밀며 급히 달리다 학생의 자전거와 부딪힌 지안. 그 장면을 동훈이 목격한다. 카트에서 떨어진 과일을 돌려주기 위해 지안을 따라가는 동훈. 그리고 거기서 카트에 할머니를 싣고 낑낑대는 지안의 뒷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지안은 할머니에게 달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래서 카트가 필요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카트에 실린 할머니. 결국 동훈의 도움으로 밝고 큰 달을 보고 돌아오는 할머니와 지안.

비현실적으로 크고 밝은 달. 그러나 저 두 사람에겐 정말 그렇게 보였을 거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 동훈은 그런 지안과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지안 혼자서 할머니를 모시고 돌아가기 어렵다는  아니까. 지안 대신 할머니를 업고 지안의 집으로 향하는 동훈. 그런 동훈의 뒷모습을 지안은 멍하니 바라본다. 방금  지안은 동훈이 좋은 사람 같다는 할머니에게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 쉽다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동훈의 모습은 쉽게 호의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동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지만 정작 지안은 동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따라 나와 돌아가는 그를 배웅할 뿐이다. 차마 동훈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시선을 땅에 떨어뜨린 채. 아마 그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을 거다.


그런 지안에게 동훈이 건네며 돌아서는 말이 '착하다'이다. 땅에 떨어뜨렸던 지안의 시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동훈이 사라진 자리에 지안은 굳은 듯 오래 거기 서있다.


이 장면을 각본집에서 봤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부분은 바로 지안의 대사 대신 적힌 느낌표(!)였다.


동훈        착하다...

지안        !


1회에서 지안이 처음으로 등장할 때를 생각해 보면 이 느낌표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사무실에 난데없이 출현한 무당벌레에 모두가 호들갑을 떠는 사이. 지안은 홀로 무표정한 얼굴로 동요라곤 없이 자기 팔에 붙은 무당벌레를 내리치고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밀어버린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한다. 그런 지안에게 식사란 일하는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싸다가 배를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옷은 계절에 맞지 않게 입는다. 발목은 늘 추워 보이게 드러나 있다.


지안에게 삶이란 입력과 실행의 반복일 뿐이다. 갚아야 하는 빚과 해내야 하는 일. 자기를 죽어라 쫓아다니는 사채업자, 차가운 타인들. 크게 보면 살아내야만 하는 무의미한 시간의 반복이다. 그럴 때 인간은 불필요한 감정은 치워두거나 가려두게 된다. 입력과 실행만이 반복되는 삶에 감정은 사치이므로.


아이가 울면 누군가 달려와 케어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울어도 돌봐주는 이가 없다면 아이는 울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지안에게 삶은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마저 빚쟁이들에게 쫓겨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고 그런 삶 속에서 감정 따위는 꾹꾹 눌러두었을 것이다. 아무리 사무실에 벌레가 들어와서 사람들이 난리를 치고 호들갑을 떨어도 지안에게 그런 불필요한 감정 따위는 애초에 재고조차 없는 것이다.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아주 작은 감정조차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곳에 쓸 힘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무표정하고 무신경하고 사회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지안의 본모습은 따로 있다. 지안은 사실 어려움을 감수하며 할머니를 요양원에서 침대째 모시고 와서 돌보는 인물이다.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인물. 수없이 마주치는 타인들 중 누구도 그런 지안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물론 지안도 말하지 않는다. 감정은 눌러둔 채 살아야만 하니까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진다.


무엇보다 지안이 스스로 인식하는 자기 자신은 살인자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살인일지라도 죄책감은 그녀의 삶을 짓누른다. 절대 행복해져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마음먹은 듯이 살아간다. 더구나 자기가 죽인 사람의 아들은 사채업자가 돼서 매일같이 숨통을 옥죈다. 일그러진 자아상과 메마른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지안 앞에 마침내 저 말이 들려온 것이다. 구원처럼.


"착하다."


"착하다."


그 말은 지안이 봉인해 온 감정들을 해제시킨다. 느낌표를 잃어버리고 살아야만 했던 한 불쌍한 인간이 느낌표를 되찾는 순간이다. 지안의 일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그녀의 본질을 알아본 동훈이 던진 그 한 마디. 지안이 어릴 때부터 제대로 들어본 적 없을 그 한 마디. 착하다. 지안이 이 순간이 담긴 녹음파일을 계속 반복해서 듣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단단한 벽에 최초로 균열을 일으킨 말이기 때문에.


지안     !

우리는 모두 안다. 이 세상에 구원은 없다는 걸. 신조차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는데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리는 없다는 것을. 다만 곁에 있는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보고 조심스럽게 응원할 수는 있다. 물론 누군가 나의 슬픔이나 감추고 싶은 것들을 읽어내고 꿰뚫어 본다는 건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다. 값싼 동정으로 쉽게 뱉어진 '착하다'였다면 지안에게 그렇게 큰 울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훈은 주저주저하다가 최대한 담담하게, 싸구려 연민이라곤 전혀 담겨 있지 않은 한 마디를 어렵게 어렵게 내뱉는 것이다. 꼭 전해야 할 말이지만 최대한 지안을 배려해서.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동훈이 지안을 사랑했는지, 어른으로서의 책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안의 입장에선 적어도 지안을 제대로 알아봐 준 최초의 사람을 만난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알아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 사람이 내면에 가두고 있는 복잡한 자아의 일면을 보았다고 느끼며 숨겨진 것을 찾아낸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 나의 숨겨진 면을 찾아주고 알아봐 주는 순간. 그리고 응원해 주는 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마침내 누군가와 그런 식으로 마주쳤을 때 한 인간의 내면에는 균열이 일어난다. 절대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장면을 좋아한다. 한 인간의 균열을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라서. 살면서 처음 위로받아본 한 사람의 삶이 따뜻한 빛을 만나 밝혀지는 느낌이라서. 역시 지안은 동훈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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