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발리까지
발리에서 매일 서핑한 지 2년째, 기본적인 신상 소개를 마치면 나오는 질문이다.
적지 않은 나이로 보이는 내가 발리에서 요러고(?) 있으니 궁금할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회사원이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여의도 회사원
그것도 인턴부터 시작해서 팀장까지 6년 반 동안 한 회사에 몸담았던 충성스러운 회사원
일요일 새벽이면 다음날 출근하기 싫어서 새벽까지 잠 못 이루기도 하지만,
월화수 목금금 금은 물론이고 새벽 출근에 야근까지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던 시절이 있었던
사실, 회사생활은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 많았다.
커뮤니케이션 컨설팅이라고 쓰고 홍보회사라고 읽는 직종에서 일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역량이 발전해 가는 모습(물론 나 자신을 많이 갈아 넣어야 했다)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배울 점이 많은 선후배들과 함께 하나하나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보람찼다.
회사 내외부에서 인정받아 커리어를 쌓아가며 나름 여의도 커리어우먼의 시절을 보냈다.
회사에는 정직원 3년 근속자에게 2주간의 유급 휴가를 주는 아주 훌륭한 복지제도가 있었다.
인턴과 계약직을 보내고 약 4년 정도 가열하게 쉬는 날 없이 일하던 나에게도 리프레시 휴가가 다가왔고,
여행 계획을 세울 여유도 없던 나는 정해진 스케줄을 소화하면 되는 발리의 서핑 캠프로 무작정 떠났다.
발리의 서핑 캠프는 전지훈련 온 태릉선수촌이랑 똑같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바다에서 서핑하고, 돌아와서 지상 훈련하고 낮잠 자고 저녁 먹고 자는 일상
이렇게 몸을 많이 쓴 적도 없었고,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 적도 처음이었다.
몸을 열심히 움직이니까 낮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소화도 잘되고
회사 걱정, 일 걱정 없이 따뜻한 발리 햇빛에 늘어져 있다 보니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서핑 캠프에는 내가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많았고, 다들 좀 미쳐있었다 (?!)
퇴사하고 발리에 온 사람이 평범한 수준...?
내 커리어, 직장생활, 언젠가 돈 벌어서 살 내 집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그게 일상인 줄 알았던
여의도 속 개구리였던 나에게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줬던 캠프생들과 발리의 일상
발리에 다녀온 이후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다 그 이후로 꼭 2년 뒤, 퇴사하고 발리로 왔습니다.
발리에서 보낸 2년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과거 회사생활처럼 발리의 생활도 매일 반복하는 비슷한 일상이 되었지만,
서핑이 나를 변화시키고, 발리라는 공간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지금, 아직, 이렇게 발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