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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상어 Oct 27. 2019

아빠의 시간과 무게



아빠는 한 평생 농사를 지었다. 가족이 먹을 만큼, 그리고 가계에 보탬이 될 정도의 규모였다. 

규모가 작다고 일이 적지는 않다. 오히려 큰 규모의 농사보다 개인의 노동력이 더 요구된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시기별로 논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자라는 걸 살피고, 수확을 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가정을 이루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그렇게 농사를 짓고 산다. 


지게를 지고 다녔던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첫 3년 동안 빤스 한 장 안 사 입고 서빙으로 번 돈으로 고향에 먼저 땅을 샀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서울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기반을 잡으려고 노력하셨지만, 아빠에게 남은 건 처음 샀던 고향 땅이었다. 


엄마와 두 살 난 나를 데리고 다시 고향에 온 서른셋의 아빠에게 농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30년 넘게, 그리고 지금도 아빠는 회사를 다니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두 개의 직업 중 하나만으로는 우리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고, 이른 새벽 회사에 출근하고 이른 오후에 퇴근한 아빠는 술 한잔 드시고 논과 밭으로 다시 출근하셨다. 


나는 농사짓는 일이 싫었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가족의 노동력으로 이뤄지는 농사가 지겨웠다. 

티비 보고 싶은데 나가서 풀을 뽑았고, 놀러 나가고 싶어도 농작물을 심는 날에는 어디도 갈 수 없었다. 

한 여름 뜨거운 햇빛 아래서 쭈그려 앉아서 고추를 따는 일은 고역이었고 가을이면 밖에 널어둔 무언가를 매일 거둬들여야 했다. 


20살이 되어 대학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나를 보고 아빠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셨을까? 

엄마 아빠의 노동력과 희생으로 자라, 일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 떠나는 딸을 보면서 마냥 뿌듯하셨을까? 집을 떠난 스무 살 초반에는 집에 내려가지 않으면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좀 더 철이 들고, 일로 돈을 벌어 나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게 되었을 때 아빠의 노동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첫 주, 퇴근 후 좁은 고시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다 플랫폼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적이 있다. “앞으로 몇십 년을 어떻게 매일 출퇴근하고 일을 하지? 아빠는 도대체 어떻게 이 세월을 버티셨지?” 그 주 집에 내려가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드리며 그제야 아빠의 무거운 어깨가 보였다. 


하지만 자식 눈에는 보이기만 했을 뿐이다. 아빠의 짐을 대신 들어드릴 수도, 노동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저 독립한 자식으로 건강하게 가끔 철없는 짓을 하는 자식이다. 그 철없는 딸이 멀쩡히 직장을 다니다 먼 나라로 떠나서 일 년 만에 얼굴을 비춰도, 아빠는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며 그대로 계신다. 


아빠의 일평생 의지처는 술이었다. 일하러 가기 전에 한 잔, 일이 고되면 한 잔, 속상한 일이 있으면 한잔, 기쁜 일이 있으면 한 잔. 기쁜 일로 한 잔 보다는 일이 고되고, 힘들어서 드신 일이 많은 인생이셨다. 

지금은 그 의지처로 삼던 술을 조금이라도 적게 드시기 위해서 낮 시간 동안 일을 다니신다. 


자라면서 아빠가 언성을 높이시고, 화를 내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술을 매일 마셔도 실수 한 번 하신 적이 없다. 아빠의 일평생 목표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사는 일이고, 그렇게 살아오신 것에 자부심이 있다. 나도 아빠의 인생을 옆에서 배워서 그런지 같은 목표로 살고 있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해도 나는 나의 인생을 우선순위로 두고 산다. 아빠는 지금처럼 그래 왔듯이 무겁고, 책임감 넘치는 아빠 인생을 걸어가실 것이다. 다만 아빠가 살아온 인생에 누가 되지 않게, 부끄럽지 않게 그런 아빠의 딸로 걷고 싶다. 그리고 아빠도 아빠의 남은 인생을 위해 술을 조금만 줄이셨으면 좋겠다. 술 대신 자식들이 아빠의 의지처가 되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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