씹을거리를 가져오세요 in Romania, 2018 바벨 페스티벌 원정기
‘바벨 페스티벌(Babel F.A.S.T., http://babelfest.ro)’은 루마니아의 트르고비슈테라는 도시에서 2007년부터 매년 여름 진행하는 국제연극제이다. 바벨이라는 이 축제의 이름은 성서에 나온 바벨탑의 모티브에서 가져왔는데, 우주의 진리, 완벽에 다다르려 했던 인간의 바람이 이 축제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기에 바벨이라는 명칭을 이 축제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가 함께했던 올해의 바벨 페스티벌은 6월 3일부터 10일까지 8일간 진행되었는데, 루마니아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슬로바키아, 러시아, 멕시코, 프랑스, 핀란드, 알제리, 스코틀랜드, 포르투갈, 벨기에, 일본 등 다양한 나라들의 극단들이 참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에는 극단 가치가의 “레퀴엠 포 안티고네(Requiem for Antigone)”와 우리팀 해보카 프로젝트의 “씹을거리를 가져오세요 in 루마니아(Bring Your Own SSIP in Romania)”가 초청되어 이번 루마니아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벌써 추억”.
씹을거리를 가져오세요를 루마니아에서 루마니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머나먼 동유럽 땅을 밟은지 한 달이 지나 모든 여정이 끝난 지금 드는 가장 큰 생각이다. 홈그라운드가 아닌 어웨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는 보통의 노력보다 2~3배는 더 많은 노력과 고생을 필요로 한다. 그걸 알면서도 좋은 뜻이 있는 곳에는 작은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는 믿음이 있었다.
공연이 올라가는 바벨 페스티벌에서 우리는 6/9(토), 6/10(일) 2회 공연을 하기로 주최측과 협의를 했고, 선발 멤버인 나(연출), 태윤(조연출), 상욱(영상감독) 세 명은 20여일 전인 5/22(화)에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로 입성했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루마니아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우리가 잘 모르는 루마니아라는 곳의 씹을거리에 대해 듣고, 우리의 씹을거리는 뭔지 그들에게 이야기하며 대화 나누고 싶었다.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첫날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동태를 살핀 후, 처음 텐트를 치기로 결정한 장소는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큰 공원 중 하나인 우니리 공원(Parcul Unirii)이다. 가장 중심지에 있는 공원이라 사람도 많고, 분위기도 활기차고, 뭔가 우리를 그나마 덜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되자 하루종일 엉덩이가 무거웠다. 조연출 태윤이, 영상감독 상욱이와 나가자고 한 7시가 가까워지자 무거워진 엉덩이는 한참을 더 무거워졌다. 숙소에서 나와 우버를 불러 텐트를 싣고 공원으로 향하는데 오늘따라 우버도 빨리 오고, 퇴근길이여서 반대편 차선은 엄청 막히는데 우리 가는 길은 슝슝 잘만 뚫렸다. 해가 저버리면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하자...'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스물스물 올라왔으나 모든 상황은 뭔가를 해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아주 원활하게(?) 진행됐다. 주변에 사람들도 많고 길가에서도 잘 보이는 지점을 정한 뒤, 텐트를 꺼내 주섬주섬 세우기 시작하자 주변 루마니아 사람들의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쟤네 뭐지...?'
텐트를 꺼내고 나서 2분이나 지났을까? 여지없이 공원 반대편에서 관리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 근처에 앉아있던 무리로 향해 경찰들이 다가와 뭐라뭐라 지적을 하기 시작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상한 공원 안에서 쫓겨나 집으로 향하게 될 그림이 머리 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상욱이는 우리가 쫓겨나게 될 가까운 미래의 장면을 아름답게 담기 위해 카메라를 꺼냈고, 그렇게 나와 태윤이는 낯선 루마니안 관리자 아저씨들을 맞닥뜨렸다.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았고, 안 된다는 손짓만 돌아왔다. 구글 번역기를 동원해 대화를 시도하자 구글은 "Police Fine(경찰 벌금)"이라고 친절하게 얘기해줬다. 옆에 앉아있던 영어가 가능한 루마니아 여자분의 도움을 받아 좀 더 많은 대화가 시작되었고, 가져간 브로셔에 있는 마포대교 위에 설치했던 텐트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미소를 선보이며 우리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텐트를 치고 사람들과 씹을거리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Theater Artists”라고 소개하자 뭔가 이야기가 호의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점점 긍정적으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30분도 괜찮냐?"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선한 미소와 함께 "Da"를 외쳤고, 결국 접근성은 좀 떨어지지만 좀 더 아늑한 공원 한쪽 자리를 허락받았다. 그렇게 첫 텐트 설치가 시작되었다. 결국 우니리 공원에서의 30분은 3시간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작은 텐트 안에서 많은 루마니아 빡친들을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첫 씹을거리 텐트를 세우자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흘끗흘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한 시간 정도의 기다림 끝에 루마니아 현지 씹을거리 텐트에 들어온 첫 손님은 스무살 남녀커플이었다. 한 명은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있는 친구였고, 그녀의 남자 친구는 일찌감치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Raluka였는데 그녀는 가족들에 대한 불만을 많이 털어놨다. 그런데 커플이 텐트에 들어와서 의아해하며 물어봤던 것 중 질문은 이거다. “근데 너희 나라는 길에다 텐트치고 술먹는거 괜찮아? 우리 나라에서는 불법인데…”. 작업도 좋고 공연도 좋지만 함께 간 팀 멤버들이 난처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나라에서 법을 어기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좀 아니다 싶어 아쉽지만 가지고 간 음료수들로 대신 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자신이 애니메이터로서 나름의 꿈을 꾸고 있는데 본인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데로 강요한다고 이야기했다. Raluka의 씹을거리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루마니아의 세대간 차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녀가 이야기한 것들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하나는 자신의 부모님은 루마니아가 예전 공산주의 시대일 때 이야기를 하며 그때의 좋았던 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지금 루마니아를 계속 못사는 나라로 남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Raluka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묘하게 예전 대통령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가 아는 어른들의 모습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다.
Raluka가 떠나간 뒤 한참을 소강상태였던 씹을거리 텐트에 와서 술에 취한 취객이 큰 소리로 “너네 여기서 뭐하는거야?”라는 말을 계속 건냈다. 가까이 가자 술냄새가 진동했고, 약을 한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몸을 휘청이며 계속 이 텐트가 뭐하는건지 물어봤고,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했다. 그러더니 대뜸 “그래서 이거 하면서 원하는 게 뭔데?”라는 질문을 거칠게 건넸다. 뭔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라 여기 루마니아 사람들과 씹을거리에 대해서 대화 나누려고 멀리 한국에서 온 거라고 얘기했지만 돌아오는 질문은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고?” 였다. 지나가던 취객의 지나가는 딴지처럼 들렸던 말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루마니아에서의 씹을거리를 가져오세요 라는 작업이 나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여기 관객에게 어떤 의미일지 여러가지 고민이 스쳐 지나갔던 순간이기도 하다.
후달렸던 루마니아 시내 첫 텐트 설치에서 스무살내기 커플과 약쟁이로 의심되는 두명과 묘한 대화를 나누고 나니 시간은 벌써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텐트를 접기 전에 우리에게 자리를 허락해준 공원 관리인들에게 다가가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건네자 괜찮다는 웃음과 함께 혹시 담배없냐는 손짓을 했다. 담배가 없다고 하자 텐트 안에 놓인 보드카를 가리키며 저것도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두명 중 한명은 근무 중이라 안 마시겠다고 했고, 다른 한명은 자기는 달라고 강력한 의사를 표현했다. 플라스틱 컵에 보드카를 반 정도 따르자, 더 따르라고 하며 그렇게 종이컵의 8부를 채운 보드카를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그렇게 우리는 공원 관리인들에게 약소하게 8부 보드카 두 잔으로 감사를 표시하며 텐트를 접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어떻게든 첫 텐트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시작했고, 사람들과 작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신기함과 경찰서에 끌려가지는 않았다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서울에서 씹을거리 텐트를 쫓겨날까봐 걱정하던 것보다 두세배로 몰려드는 불안감 속에서 앞으로의 여정이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감과 걱정이 뒤섞이는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