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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라 Nov 01. 2024

슬로우보우트 투 차이나-17 검찰이 소환한 소동파

17. 검찰이 소환한 소동파

17. 검찰이 소환한 소동파   

   

  오래 전 스마트 폰도 없고 위챗도 없었던 여름, 칠월 말 나는 항주에 관광차 갔었다. 무슨 생각으로 한 여름에 항주를 갔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이라면 마윈이 전자 상거래 회사인 알리바바를 한창 발전시킬 때였다. 나는 알리바바라는 이름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그 회사의 사장이 누구인지, 본사가 항주에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항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소동파가 사랑한 서호나 남송 궁궐 터, 경항대운하 물길 정도였다. 항주야 과거부터 물산이 풍부해 살기 좋은 도시로 유명했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현재는 상해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산업에 유리할 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항주는 중국 전자상거래 산업의 중심 도시로 커오고 있었다.

  그날 뙤약볕 아래, 서호西湖, 소제蘇堤 위엔 여행사 깃발 아래 스포츠 캡을 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사병으로 멀쩡한 사람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에 중국 전역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서호 안에 소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거대한 띠가 되어 소제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옆에서 움직이던 은퇴자 모임에서 온 백발의 여행자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결국 탈진한 이는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서호 팔경이고 나발이고 간신히 식당을 찾아 들어가 쉬었는데 식욕부진으로 과일주스만 먹었다. 항주에 머물던 기간 내내 더위의 기세에 눌려 요리다운 요리는 아예 입에 대지도 못했고, 서호 주변과 경항대운하 관광만 간신히 끝냈다. 소동파의 동상 앞을 지나쳐 갔었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임어당의 ‘유쾌한 천재’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가 소동파 전기인 ‘유쾌한 천재’를 다시 생각했던 때는 2017년 봄이었다. 당시는 대통령 탄핵으로 모두가 혼란스러운 감정에 있었다. 누군가는 절망스러워했고 또 누군가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살려 나가는 심정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하루는 티브이를 보다가 검찰총장의 퇴직 뉴스를 보았다. 돌아보면 나는 고위 공직자의 취임, 퇴임 뉴스나 다른 정치 행사 뉴스를 그렇게 세세히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탄핵 전후로 많은 굵직한 사건이 터져 나왔던 시절부터 예능과 드라마 쪽으로 발달해 있던 나의 촉수는 정치 뉴스 쪽으로 이동해 왔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종일 퇴임식을 거행하고 검찰청 건물에서 나오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봤다. 그는 내가 갖고 있던 검사 얼굴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내 머릿속의 전형적인 검사란 얼굴의 살집이 두둑하면서 턱이 사각이거나 적당히 뭉툭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역삼각형 타입이었고 눈빛이 날카로워서 시베리아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강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그 면도날 같은 눈빛만을 제외하면 옛날 영남의 서원을 지키던 유생이나 깐깐하지만 지적인 교수 같은 얼굴이었다. 그가 검찰청 건물을 나올 때, 기자들이 출입문 앞에 몰려와 있었고, 기자들은 검찰 생활을 정리하면서 검찰개혁과 사회지도자로서 국민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화가 되지 않지만 정의로움은 지나치면 잔인하게 된다” 

   (過乎仁 不失爲君子 過乎義 則流而入於忍人 故仁可過也 義不可過也     


  기자들이 멋진 퇴임사로 신문이나 방송기사에 인용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기자의 보도를 듣자마자 내 머릿속 어딘가에 처박혀서 거들떠보지도 않았 기억이 순식간에 복원되었다. 십수 년 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던 ‘유쾌한 천재’ 속의 내용, 그러니까 신법파와 구법파가 번갈아 득세를 했던 북송北宋의 특수했던 정치 상황과 신법파가 정권을 잡은 조종으로부터 구법파로 낙인찍혀 여기저기 귀양을 다녀야 했던 소동파에 대한 기억이었다. 기자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별다른 생각 없이 들었겠지만, 분명 그는 북송의 정치를 알고 말했을 것 같았다. 개혁을 추구했던 북송 정책의 종말은 흐지부지했고, 소동파처럼 뛰어난 인재가 순탄한 관직 생활은커녕 황주, 해남도 같은 미개발지에서 귀양살이해야 했다. 그는 시민에게 완곡하지만 분명 훈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소동파를 인용하는 말을 듣는 순간 불안과 무서움에 소름이 끼쳤다. 천 년 전 문인의 케케묵은 말을 듣고 현대인인 내가 무서움에 소름이 돋을 일인가? 그런데 나는 조금은 예민한 반응이긴 했지만 정말 그랬다. 

 내가 느꼈던 불안과 무서움의 근원은 그의 지적으로 깊은 교묘함에 있었다. 우리 시대를 북송에 빗대고 있었고 자신을 비롯한 보수파들이 소동파처럼 박해받고 있다고 아주 슬며시 은연중에 말하고 있었다. 법이라는 사회과학에 인문학적인 내용까지 겸비한 그는 학식과 경험, 교양 모든 면에서 평범한 시민을 압도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소동파에 대한 지식을 소환하다 보니 불안과 무서움은 분노로 번졌다. 검찰총장의 퇴임사로 인용된 소동파의 글귀는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비틀려 있었다. 그 글귀는 동파가 20대 초반, 과거 시험지 답안에 쓴 말이었다. 소동파는 나라의 제도에 대해 논하면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왕일지라도 자기 뜻에 반하는 신하, 즉 정치범에 대해서 사형을 내리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였었다. 그러니까 아랫사람인 소동파가 왕이라는 권력에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검찰총장은 공직자라는 높은 위치에서 똑같은 말을 아래를 행해, 즉 시민들을 향해 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의미의 전복顚覆이었지만 이미 이런 말의 수법은 2000년 대 이후 횡행해온 일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그 퇴임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퇴임사를 보도한 기사 중 소동파나 송나라의 정치에 대해 덧붙이는 설명을 한 기사는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동파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이해한 것과 똑같은 것을 느꼈다. 누가 누구에게 인자하다는 것일까. 검사가 인자하게 기소를 안 했던 사람들이 누구였지?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니 계속 기소를 안 하겠다는 것일까?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하면 정의로움이 지나치게 된다는 말일까? 말이란 누가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말도 의미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그는 시민뿐만 아니라 검사 후배들에게도 당부의 말을 남겼다. ‘수사에 있어서 소신은 존중 되어야 하지만, 나만이 정의롭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역시나 깊이 있는 말이었다. 정의는 희소하기도 하고 숭고한 가치라서, 그 단어만으로 사람을 속이기 쉽고, 그 단어 앞에서 사람들은 현혹 당하기도 쉽다. 그래서 ‘정의’란 단어는 위험하다. 그러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법관이나 공직자,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정의’의 가면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충고는 언제나 유효하고 실용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검찰총장이 한 ‘나만이 정의롭다는 생각을 경계’해야한다는 생각은 지당하다. 그런데 역시 이 말도 누가 왜 하는지 물어봐야 한다. 

  정의의 위험성을 말하는 조언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당부하거나 스승이 제자에게, 혹은 진심 어린 우정을 전할 수 있는 사이에 하는 말로 적당하다. 그는 후배검사들의 아버지나 형님, 선생님의 입장이 아니라 조직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그는 수십 년 검찰청 생활을 하면서 정의로워지려는 검사가 조직에서 버티기 힘들고, 냄새 안 나게 살살 조직에서 밀려 나가게 했고 그래서 정의 운운하는 검사들 몇 명은 우연히 남은 비주류 여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한다. 정의로움 검사를 맘모스에 비유하자면 이미 맘모스는 멸종했고 실험실이나 동물원에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인데, 맘모스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실 들판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멸종한 맘모스가 아닌 승냥이나 하이에나, 흑곰일 수 있는데 마치 그런 것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한다.      


  나는 의미가 거꾸로 서는 말을 교묘히 하는 그들의 집단 혹은 조직이 새삼 무식한 한 사람보다 무섭다는 생각에 떨었다. 하지만 주체가 뒤바뀌고 의미가 거꾸로 선 말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살아온 지 수십 년인데 그런 말이 새삼 무섭다고 하는 것도 호들갑일 것 같았다. 남은 것은 참고 사는 것 뿐이었다. 증언이라는 영광의 순간 정도야 마음에 품어 볼 수 있으니 그저 두 눈 뜨고 지켜보며 견디기로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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