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글방(2023.02.26. 일 교육철학)
아기를 키우며 내가 얼마나 죄 많은 인간인가를 매일 깨닫는다. 내 감정에 치우쳐, 아이들의 분노에 같이 동조하여,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속상하여 했던 모든 행동들이 얼마나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는가를 통감한다. 그때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최선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를 절실히 깨닫는다.
“선생님 애 안 낳아봐서 모르죠?”라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면전에서 들었을 때 ‘뭐래, 그럼 죄 지어본 범죄자만 경찰하나?’라고 생각하며 생긋생긋 웃었지만 지금은 ‘그래 낳기 전에는 절대 모를 일이다’라고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되었다. (물론 100프로 동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를 낳기 전의 나와 낳은 후의 나 중 누가 더 나은 교사냐 하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아기를 낳기 전의 나는 ‘내 아이처럼’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 나의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나는 그 애들이 내 아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스스로를 해치는 습관을 고쳐주고 싶어서, 조금만 더 하면 잘할 걸 알아서 욕심 있게 아이들을 대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후의 나는 어느 아이도 내 아이보다 우선순위에 놓을 수 없다. 하지만 ‘내 아이처럼’ 조금 더 기다려주고 조금 못하더라도 욕심을 참아볼 수 있다.
열정과 너그러움 중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안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면모이지만 어느 쪽에 무게를 더 두느냐의 차이는 있다. 아이들의 성향이나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소에 따라 어느 모습의 교사가 더 아이들에게 이로운지는 달라질 수 있다. 더군다나 내 아이와 나는 몇십 년을 함께할 장기전이지만, 교실의 아이들과는 1년뿐이라는 시간적 제한을 생각해 보면 어떤 것이 더 좋은지는 더 알 수 없어진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겠는가. 내 아이처럼 기다려 줄 수 있는 마음, 내 아이처럼 여길 수 있는 마음 둘 다 결국에는 아이들을 향한 사랑의 다른 모양이다. 교대임고시절 영어 면접을 연습하던 중 원어민교수님이 정말로 궁금한 듯이 물었다. “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물으면 한국인은 백이면 백 ‘사랑’을 넣는다고. 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교사의 자질이냐, 교사는 직업이기에 사랑은 오피셜한 덕목이 아니라는 거였다. 이 대답은 교직윤리 교수님의 직업관 설명으로 대체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 교사는 교사가 스스로를 ‘성직’으로 여기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존중하는 존재가 되길 기대받는다. 그러므로 <사랑>이 교사의 필수불가결한 교사의 덕목으로 여겨지고 아이들을 부모처럼 사랑하고, 챙겨주지 않으면 자질이 부족한 교사로 비춰진다.
다만 어려운 점은, 교사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교사를 ‘서비스직’으로 여겨 행동뿐 아니라 감정과 관련된 민원도 타당하다고 생각하니(여기서 밤늦게 전화하기와 학급운영에 대한 지나친 개입 등이 발생한다) 서비스직과 성직을 동시에 수행하기를 요구받는 직업이라고 한다. 따라서 교사는 스스로가 성직, 서비스직, 사무직(개인적으로는 혼합직이 아닌가 생각한다.) 등 다양한 직업관중에서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기준을 정하고 중심을 잘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서비스직, 사무직, 전문직, 성직 중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모든 선생님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고. 폭언이나 폭행에 시달려도, 지나친 업무에 치여도, 학생들과 문제가 생겨 괴로울 때도 결국에는 사랑하는 마음을 무시하지 못해서 그만둘 수 없는 거라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 동료교사와 학교에 대한 사랑, 교사로서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을 존중하는 사랑, 직업인으로서 나의 직업을 아끼는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
때로는 어렵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학교에는 있다. 그러나 선생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웃어주고 편지를 쓰고 좋아하주는 아이들이 교실에 있다. 그러니 나도 온 마음 다해 사랑하자고 사랑 말고 미움이 도래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온다면 기꺼이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자고, 어디에서든 숨어있는 사랑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