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평 Feb 19. 2021

일태기 극복 썰 풉니다

반성문이기도 하고요


취업에 성공하고 두 달가량은 시간이 흐르는지 마는지 몰랐다. 한 해가 끝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연구사업은 연말을 기점으로 끝나기도 하거니와 당시 담당하던 (나름의) 중대 과업을 매듭지어야 하는 마지노선이, 정직하게도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야근 시간을 가능한 줄이고 싶어 저녁은 대부분 편의점 컵밥으로 해결했다. 이건 뭐 퇴근시간인지 출근시간인지 알 길 없는 시각에 연구원 문을 나서는 날도 있었다. 며칠간 계속되는 야근에 머리가 띵해지고 눈앞이 흐려져 옆에 앉은 박사님을 붙들고 "저 이제 진짜 못하겠어요 박사님.. 제발 내일 해요.."라고 애원도 해봤다(물론 이 제안은 찌찌뽕이었다. 박사도 사람이다).




그리하여 왔다. 와버렸다. 뭐가 왔냐면, 일태기가 왔다.

증상은 대강 이랬다. 우선 누가 말 거는 것이 싫다. 할 일은 아득한데 시간은 눈치도 없이 여느 때와 같다. 사실 시간이 있다 쳐도 내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딘지 모르겠는데! 혼자 있고 싶다고, 울고만 싶은 심정이 자꾸 발동되는 것이다. 자연히 말수도 줄어든다.

걸음걸이에 힘이 없고 덩달아 표정도 없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닌다. 물은 물이오 산은 산이로다 하는 심정으로 넋이 나간채 발을 대충 옮긴다. 덧붙이자면, 일주일 전 오랜만에 마주친 한 동료분은 내 걸음걸이가 부쩍 가벼워졌다고 했다. 어지간히도 괴로운 척하고 다녔다 이 녀석아.


그렇다고 몸을 혹사시키는 일을 불가항력적으로 못 견디는 것은 아니었다. 석사과정을 되돌아보면 새벽 서너시에 잠들어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일곱 시에 일어나 여덟 시까지 조교실에 출근하고, 일하다 남는 시간엔 공부한다. 저녁 대여섯 시에 퇴근해 24시 카페로 다시 출근이다. 논문을 읽고 쓰다 보면 다시 새벽 세시. 집에 가서 잘 시간이다. 이게 바로 특별할 것 없는 대학원생의 삶이었고, 이 시간을 즐기는 편에 속했다. 문제는, 이 시절과는 달리, 진짜 좋아한다고 느꼈던 주제와는 멀게 느껴지는 일들이 내 눈 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진짜 문제는 이렇게 ‘생각’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바쁜 시간이 지나고도 일태기의 증세는 가실 기미가 안 보였다. 어쩌면 ‘이젠 좀 쉬어도 되지 않겠냐’며 영혼 없음 상태에 당위를 부여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유시간이 생기니 지근거리에 있던 사람들과 대화가 늘었다. 그제야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새해가 되었으니 신선하지는 않지만 열정 넘치는 다짐을 하고 더 나은 삶을 찾으려 애쓰는 풍경이다. 특히 가까운 동료들은 한 발 앞서 나가고자 가지각색의 공부를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니 내 속에 숨어있던 긴장과 우울, 두려움 같은 것들이 매연처럼 마구 뿜어져 나왔다.


나는 뭐 하고 있었지?
나 또 뭐해야 되지?
나만 뒤쳐지는 거 아닌가?


순식간에 토플 시험을 등록했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내가 진실로 원했던 것인 양 따라 했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믿거나 존중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학’과 같은 중대사를 고민도 제대로 끝마치지 않은 채 비장한 결심인 것처럼 들고 나왔다. 이밖에도 맘에도 없었으나 그냥 멋져 보였던 그 어떤 것들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떠들어댔다.


맞을 리 없었다. 금방 덜미가 잡혔다. 남은 그럴듯하게 속여도 자신을 속일 순 없는 법이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말이 전언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난 스스로에게 그다지 순종적인 인간이 아니었고, 날 나보다 더 잘 아는 이들, 혹은 잘은 몰라도 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려주는 이들이 주변에 있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다. 아아, 불안으로 만든 지붕은 그럴싸하게 커다랗지만 실속은 없는 신문지 덮개일 뿐이라는 것. 그래 그거라도 알았으니 되었구나.


‘사리분별'과 '분위기 파악' 기능이 다시 탑재되었고 ‘열정' 옵션이 전례 없이 추가됐다. 개인적으로는 남을 따라 하지 않으면서도 각고의 노력을 투입하는, 이른바 '괜찮은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도움되지 않는 시간이란 없었으니까.




별로 멋없는 시간을 지나고 나니,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식물을 키우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려식물을 들이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매일 아침 분무기로 잎에 소량의 물이라도 뿌려줘야 하고, 자꾸 들여다보며 흙이 말랐을 즈음 물을 새로 받아 화분 채로 흠뻑 적셔줘야 한다. 인간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업무시간 밖에서도 살아있어야 하니까, 자신을 직장인으로만 규정지어선 안 된다. 나는 누구고 무엇을 원했는지를 깜빡하기 싫다면 시간 내 들여다봐야 한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이란 없지 않은가. 직장인으로서의 시간과 인간으로서의 시간은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연구라는 업을 선택한 사람은 ‘직장인’의 범위에 들어가지 못할 것만 같다. 꾸준한 엉덩이와 오롯한 사명감을 가지고 삶과 연구를 일치시키는 자만이 이 자리에 어울릴 것 같다. 나처럼 재밌는 게 너무 많은 인간은 논외인 것처럼 느껴진다. 연구업이 고귀한 일이라는 게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무척 진지합니다’라며 열일하는 꿀벌들이 모여있는 벌집에 호랑나비 한 마리로 나풀대는 것 같은 이질감이, 자꾸만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물론 심심한 위로는 있다. 커리어 플랫폼 원티드의 이복기 대표는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일을 한다는 것이 생계유지의 수단이었다면 점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예 욕구 실현의 수단으로 변화했고, 최근엔 자아실현을 넘어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직업선택의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단다. 개인적인 선택은 틀렸을지 몰라도 이런 상황은 자연스러운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별거 없다. 유행에 편승한다.

미라클 모닝을 시작했다. ‘김유진 변호사 그거’, ‘유퀴즈 그거’ 다 맞다. 삶에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기에, 내 시간은 소중하다기에, 옆집 누구도 한다기에, 나도 한 번 해본다(후일담은 대기 중이다).


일태기 또는 인생 노잼 시기를 맞닥뜨린 그대, 그냥 앉아있지 말자. 안타깝게도 이 척박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제해줄 이는 우리 자신밖에 없다. 그러니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자꾸 들여다보고 잊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n잡 시대의 직장인, 아니 그 앞에 있는 ‘인간’의 미덕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최종합격 소식을 기다리며 자문자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