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시즌 2-60 (추가개정판)
"전대리님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유진씨!"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인사팀 사무실로 들어서자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 위로 나를 한 번 훑어본다. 처음 놀랐던 유진의 표정은 멀쩡한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미소를 띤다.
"근데 무슨 일로...?"
"아! 참 접수된 병가(病暇)를 철회해야 해서요, 본인의 확인이 필요해요, 여기 서류 확인하시고 사인해주시면 돼요"
"요즘 덕분에 책 잘 보고 있어요"
"헤헤 그게 뭐 다 대리님 덕분이죠 뭐"
"대리님 요즘 책 많이 읽으시는 거 같던데요"
"잘 읽진 않고 잘 빌리기만 하하하"
유진은 삭막하던 DG오토모티브 본사 사무동 건물 안에 사내 도서관을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그 아이디어는 출처는 나였지만 그 이후 모든 일은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그녀는 여리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있어서는 당차게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은 첫 만남 이후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였다.
퇴근시간이 지나고 어김없이 사무실에 남아 야근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전대리님 그만 퇴근하시고 한 잔 하러 가시죠!"
"갑자기 웬 술? 안돼. 이번 주까지 설계원가 견적 제출해야 돼서..."
"오늘만 하고 죽을 것도 아닌데, 내일 하시고 나갑시다."
"어딜?"
"저희 오늘 동기 모임 있는데 한 잔 하려고요"
"거기 내가 왜?"
"대리님도 뭐 입사 동기 아닙니까? 경력동기 하하하"
"그래 뭐 동기는 동기지 하하"
그간 쌓인 스트레스로 알코올이 필요했다. 영대의 한 포차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술잔을 기울이며 앉아있다. 한눈에 봐도 신입 사원임을 눈치챌 수 있을 듯한 새로 산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다. 아직 옷감의 색과 결이 살아있다. 수십 번의 물질(세탁)과 열질(다림질)을 견뎌온 내 것과는 확연히 달라보인다. 나도 예전에 신입사원이었을 땐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며 잠시 회상에 잠긴다.
"어!? 봉래 부대장 왔다!"
"야~ 왜 이래 늦냐? 너가 회사일 다하냐?"
"몰랐냐? 내가 없음 회사 안 돌아가는 거?"
"푸하하~ 역시 그 허세는 어딜가지 않는구만"
"어 근데 이 분은?"
"어! 인사해! 우리 팀 전희택 대리님이야, 우리랑 같이 경력으로 입사하셨어 우리 팀에서 나의 소울 메이트이신 분이야 하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그게 멘탈이 도인 수주운… 웁!”
"아... 아무것도 아녜요 하하하 자자! 우리 대리님도 오셨는데 한잔하시죠!"
다들 내가 대리하는 말을 듣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편히 앉으라고 얘기한다. 그들은 나에 대해 뭔가 들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무리 중에 한 남자사원이 말을 하려 하자 봉래 씨는 그의 입을 막으며 급히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
그 와중에도 나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꽂혀있었다.다름 아닌 눈부시게 하얀 날 통근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그녀이다. 그런 그녀도 나를 알아본 듯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들은 신입사원 연수 기간 같은 소그룹 멤버들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소그룹의 리더가 바로 유진이었다. 그들의 얘기로는 처음에는 다수결 투표로 봉래씨가 리더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특유한 유머감각과 재치 그리고 남자다운 우람한 체격이 팀원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수기간 소그룹에 떨어지는 여러 가지 과제와 프로젝트 수행과정 속에서 그녀 특유의 흡입력 있는 언변과 강한 추진력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봉래씨도 그 부분을 인정하고 소그룹의 리더 자리를 그녀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부대장이 되기로 자처했다.
“자! 대장! 간만에 모였는데 한 마디 해야지?”
“Ok, 에브리바디~ 스탠드업~! 제군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고생들이 많다! 자~ 다들 지치고 힘들겠지만 신입사원 연수 때의 초심을 잃지 말자! 비록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우리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건배!”
“역쉬 대장! 건배!”
“건배”
그 때 유진은 나의 인생 좌우명을 외쳤다. 나도 어떨 결에 그녀의 구령에 일어서서 잔을 들고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무리 속에서 서서히 빛이 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리더십은 팀의 단합과 화합을 이끌었고 신입사원 연수기간 가장 우수한 팀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회장으로부터 최우수 신입사원 표창을 받았다. 그녀는 나도 몰랐지만 회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회사에 입사했다.
"대리님 생각도 일리가 있네요,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책 읽는 거 좋기야 좋죠! 그런데 인사팀에서 직원 역량 강화를 위해 독서를 강조하면서 정작 아무런 지원은 없잖아요, 사실 퇴근하고 책을 읽을 직원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독후감까지?"
"대리님 말이 맞아, 우리 팀은 뭐 거의 매일 야근인데... 책은 무슨 얼어 죽을..."
"그래 그래! 요즘 인사제도 개편이다 직원 역량 강화다 뭐다 해서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건 갈수록 많아지고 힘들다 힘들어 정말"
"음... 사실 독서역량 강화는 인사팀에서 제가 제안했던 안이거든요 하하"
"야! 유대장! 너는 현업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라, 회장님 옆에만 붙어있으니 알 수가 있나"
유진은 책을 좋아한다. 책은 좋다 누구에게나. 다만 좋은지 알지 못할 뿐이다. 그건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책의 이점을 알리고자 했던 모양이다. 인사평가 항목에는 교육훈련도 포함되어 있다. 모든 직원은 각 직급과 직무에 맞는 교육훈련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과정은 정부기관에서 실시하는 사외교육부터 고객사에서 실시하는 교육 그리고 온라인 강의까지 다양하다. 인사팀에서는 대대적으로 교육훈련 시스템을 바꾸고 있었다. 학점이수제를 도입해서 각각의 교육훈련에 학점을 부여했다. 각 직급별로 이수학점을 부여하여 학점 미달 시 진급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초강수 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개편된 교육훈련과정 중에서 전직원 공통 과제로 독서가 선정되었다. 그건 그녀가 제안하고 추진하고 있는 업무였다.
“아무리 바빠도 책은 읽고 살아야지 않겠어?”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책은 무슨 얼어죽을…”
“그래, 다들 일에 치여서 사는데…”
“세상에 그 많은 일을 네가 다 할 꺼 아니잖아?”
“오~”
“그 많은 일 중에 뭐가 너에게 필요한 일이 뭔지 책이 알려줄 꺼야”
“헐! 역시 대장!”
“쩐다. 쩔어!”
유진은 따지듯 묻는 봉래의 말에 차분하게 대답한다. 그녀가 좋은 취지에서 했던 일이 동기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일에 치여 독서를 하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독서에 치여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 또한 원치 않는 일이다. 사실 독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업무는 회사를 위한 것이다. 인생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업무보다 독서를 통한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건 회사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하는 회사는 장기적인 직원 육성에는 관심이 없다. 회사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직원을 가족처럼 혹은 사람이 먼저다라는 둥 입에 발린 말을 한다. 하지만 당장 실적이 악화되고 회사가 힘들어지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인적 구조조정이다. 재무상태와 실적개선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안이다. 하지만 빠르게 눈에 보이는 개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잃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책은 틈틈히 읽어야지, 니들 뭐 보나마나 틈만 나면 핸드폰에서 동영상 짤이나 보겠지 뭐, 안그래?”
“그럼 틈틈히 읽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예?!”
“회사에서 독서를 권장한다면 사내에 도서관 하나쯤은 있어야지 않겠어요?”
“음… 대리님 말이 맞네요, 회사에서 휴게시간이나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책 읽는 문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을거 같네요. 제가 한 번 건의해 볼께요”
그녀는 나의 제안에 굳은 표정을 지으며 뭔가 작심한 듯한 모습이다. 그녀가 입사 전 신입사원 연수기간 동안 보여준 탁월한 언변과 기발한 생각들은 분명 그간 쌓여온 독서의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매일 퇴근을 위해 일을 하지만 출근하지 않을 미래는 생각지 않는다. 쌓여온 업무경력은 회사를 떠나는 순간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독서로 쌓인 교양과 지식은 그대로 남아 삶의 지혜가 된다. 일에 치여 하루하루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만 늘어놓는다.
우리는 회사라는 울타리가 사회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줄만 알았지 그 울타리가 우리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인지는 생각지 못했다. 울타리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기도 하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울타리는 점점 더 높고 견고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