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이브를 만나다
아담이 이브를 처음 보고 한 말은 창세기 2장 23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은 아담이 이브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일부라는 깊은 연결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담이 만난 첫 번째 타자는 이브였기에, 아담의 자아 역시 처음으로 타자가 되는 순간이다. 이브가 등장함으로써 그는 타자를 통해 자신이 완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아와 타자가 둘 다 되는 동시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타자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자아가 될 수 있다.
#태아, 태초의 타자가 되다.
태어나자마자 태아가 처음으로 만나는 타자는 엄마다. 그리고 동시에 타자가 된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서 사는 동안 배가 고프지 않고 졸리지 않는 욕구의 충만 상태로 살아간다. 그리고 엄마의 안전한 자궁 속에서 세상에 나오는 날 태아는 아담이 이브를 처음 만난 날처럼, 엄마와 몸이 분리되고 탯줄을 잘라냄과 동시에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하나의 독립된 자아와 타자가 둘 다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은 특별한 구분 없이 시간의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뤄지며, 태아는 자기가 있는 곳이 엄마의 뱃속이 아니라 다른 공간임을 서서히 알게 된다.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을 먹고 목이 마르기 전에 물을 마시고 졸리기 전에 잠을 자고, 똥이 마렵기도 전에 배설을 했던 엄마의 뱃속과는 달리 갑자기 수많은 결핍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자신이 목이 마른 지, 배가 고픈지, 졸린지, 똥이 마려운지도 모른 채 결핍은 이내 불편함이 되고 태아는 울기 시작한다. 자신이 울자 엄마는 태아에게 어떤 때는 젖을 물리고 어떤 때는 기저귀를 갈아주고 어떤 때는 재워주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태아와 엄마는 첫 번째 소통을 하기 시작한다. 태아는 자신이 이렇게 울었을 때 엄마가 젖을 주더라 를 학습하게 되고, 결핍이 채워지는 경험을 통해 그 이후부터는 젖이 먹고 싶을 때 울음으로 젖을 요구하게 된다. 자고 싶을 때 젖을 물리면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잠들 때까지 울고, 배가 아플 때 젖을 물려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행동을 통해 태아는 점점 자신의 욕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고, 엄마는 이를 채워주는 사람이 된다. 엄마의 채움을 받으며 태아는 결핍과 충만 사이에서 자란다.
#Mère 엄마
"Mère"는 프랑스어로 '어머니'다. 라틴어 "mater"에서 유래하였으며, "mer"는 생명의 원천과 함께 연결되는 자연의 요소인 바다를 뜻한다. 언어학적으로 살펴보면, 어머니와 바다는 각각 모성과 생명의 기원과 관련하여 의미를 가지며, 이 단어들 사이에는 문화적 맥락과 정서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엄마의 마음과 바다, 엄마의 양수와 바다의 유비적인 의미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중력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에서까지도 계속 적용된다. 이 세상에 엄마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엄마 없이 태아가 있을 수 없고, 태아 누구나 엄마가 있다. 그리고 그 엄마와 함께 산다.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고, 엄마의 밥을 먹고 자라서, 엄마의 사랑은 받고 살아간다. 그리고, 엄마와 헤어지거나 죽으면,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어떤 그리움과 기억이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이렇게 시작한 소설에서 주인공 뫼르소(Mersault)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무감정, 무관심의 태도를 보인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슬퍼하지 않고, 사회가 기대하는 '정상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렸을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첫 문장이 주는 충격을 잊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그 도입은 마치 소설의 마지막 부분 같았고, 그렇기에 그 강렬한 종지부 뒤에는 그에 뒤따르는 슬픔이나 그리움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 묘사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또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흥미로웠고 궁금했다. 비정상적인 그의 반응은 어린 나에게 "왜 슬프지 않지? 엄마가 죽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하게 했다. 그런 질문들은 소설을 읽으며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 반복의 연속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변환되어, 어느 순간 나는 한 번도 나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던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뫼르소는 (mer는 바다, 혹은 어머니를 뜻하고 sault는 도약 도피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자신의 근원이었던 태초의 자궁이 제거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자아는 완전한 소외 안에 고립되어 결핍-욕구-채움의 역학관계에서 철저하게 제외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은 아담과 이브, 엄마와 태아가 세상에 던져져 맺는 자아와 타자의 무효화, 그래서 그 태초의 관계를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를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뫼르소는 어쩌면 느껴야 할 것을 못 느끼는, 이질적이고 낯선 부정이 되었다.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된 소설, 그 소설의 시공간이 시작되는 태초의 순간부터 뫼르소는 이미 엄마가 없다. 누구나 엄마가 있는데, 시작부터 그는 없었다.
#자아와 또 다른 자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소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 스페인 바로크와 르네상스의 교차지점, 환경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패러디를 통한 사회비판적 성격으로 높이 평가받는 명작이다. 나는 소설을 두세 번 읽은 후 어느 날 내 눈엔 돈키호테와 산초가 동일인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소설 속 몇몇 장면에서 나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예를 들면, 산초는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돈키호테가 바스카야 청년과 싸우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이야기가 멈추고 작가가 갑자기 개입해서 그 부분에서 이야기가 실린 문서에 그 뒷부분이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은 1인 2역을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한 장면에 담겨야 하는 순간은 묘하게 서술자가 개입하여 소설 바깥의 이야기를 한다. 이에 작가는 사죄까지 하며 변명을 이어가지만, 몇 장을 넘겨봐도 그 이야기의 끝은 나오지 않는데, 어쩌면 이는 사실 소설 속에 돈키호테와 산초는 동일인물이고, 둘의 대화도 사실은 서술적 자아가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돈키호테와 산초의 '일어날 법'한 허구적 사건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어날 수 없는' 서술적 자아 1인의 상상을 이야기로 서술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봤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상상인가?
몬테시노스 동굴 에피소드를 보면, 돈키호테는 동굴 속에서 며칠을 지내면서도, 한 번도 배고팠던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는 또한 마법에 걸리면 배가 고프지 않다며, 자신이 배 고프지 않았던 이유는 동굴 안에서 신기한 마법에 걸렸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마법에 걸리면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은, 소설 속 픽션 안에서도 배가 고프지 않고, 사람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상상적 공간에서도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몬테시노스의 동굴은 엄마의 자궁 속 태반을 암시하는 공간일 수고 있겠다. 반면, 매번 산초는 배가 고프고, 늘 배고픔을 호소한다. 산초는 항상 배가 고픈 상태지만, 산초가 음식을 먹는 장면에는 항상 돈키호테가 없다. 돈키호테가 배가 고프다고 하는 것은 소설 1, 2부를 통틀어 손에 꼽힐 정도이며, 마법의 동굴 안에서야 진정 충만한 상태로 존재하는, 어쩌면 돈키호테는 결핍을 느끼는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산초 자신이 만들어낸 가공의 자아이며, 그의 상상 속에서, 마법 안에서 만들어진 산초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 인지도 모른다. 동굴은 엄마의 뱃속과 닮았고, 또 다른 자아는 아직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지 않은, 세상에 던져지지 않은, 그래서 배고프지 않은, 엄마의 자궁 안에 있었던 완전한 상태로 회귀하고 싶어서 생겨난 산초의 또 다른 자아인지도 모른다.
#엄마와 나
어렸을 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하다', '서정적이다'. 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어왔지만 막상 나는 항상 외롭고 불안했던 기억이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어딘가 쓸쓸했고, 혼자 생각에라도 잠기노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깊어져만 가서 그 고독이 어찌나 깊은지 그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로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내게 쏟아지는 주변의 주목과 관심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 속에서 스스로 편해지기 위해, 자연스레 가장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손에 붓을 쥐고 있었고, 그렇게 십수 년 동안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내 생활이자 나 자신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말랑말랑했고, 시간이 질퍽하게 흘렀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의 것에 몰두했다. 난 늘 가진 것보다 더 있는 척을 했어야 했고, 누구도 그러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나 스스로가 그렇게 요구했다. 내가 나이기 위해선 엄마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고, 그랬기 때문에 엄마에게 더 무례하게 할 때도 많았다.
"엄마"
".... 응"
"뭐 하고 있었어? 엄마 내가 못되게 얘기해서 미안해?"
"..."
"엄마 내가 미안해, 근데, 나도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
"엄마, 듣고 있어? 왜 답이 없어... 내가 미안하다고"
"그래..."
"미안하다고 엄마,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늘 이런 식이다. 내가 참지 못한 화에 대해 난 죄인이 된다. 엄마에게 미안한 기분은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화는 늘 내는 사람이 손해다. 화를 다스리고 참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다.
"엄마 내가 미안한데... 나도..."
"알았어, 끊어"
"알았어, 끊어" 그렇게 끊기지 않던 엄마와 나와의 끈은 엄마가 죽으면서 끊겼다. 그리고 분명 엄마가 죽은 뒤의 나는 달라졌다. 나는 뫼르소와 달랐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비슷했다. 내가 감정적으로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아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례식동안에 실컷 울고 난 뒤 돌아온 집에는 5살 7살 먹은 딸아이가 있었고, 부인을 잃고 침대에 누워 목내 우는 아빠가 계셨다. 나는 그날 아빠의 울음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 울음소리는 날 슬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당장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의 밥상을 차려야 했고, 두 아이들을 챙겼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갔고, 이제야 탯줄이 완전히 끊어졌지만 엄마의 밥상을 매일 대신 차리며, 엄마의 삶을 같이 살아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죽은 엄마와 함께 살아간지 9년이 지났다. 엄마가 살아있었던 시간을 추억하며 그 시절 태아였던 나를 기억하며, 나는 엄마가 없는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신 지금은 남편과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만 밥을 차린다. 엄마를 대신하지 않아도 되는 밥상은 한결 가볍다.
엄마밥,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