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김치찌개

by 수지리

어렸을 때 나는 쿠웨이트에서 5년간 유년생활을 보냈다. 쿠웨이트는 이슬람 국가로서, 1980년대 쿠웨이트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강했으며 이슬람 법(샤리아)에 따라 특정 음식 및 음주에 대한 금기가 있었다. 알코올과 돼지고기가 대표적인 하람(금지된) 음식이었다. 현재는 하람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대 쿠웨이트 사회는 다문화적이며, 비이슬람인들에게는 예외적으로 다양한 식음료가 허용된다. 하지만 그 시절 외국인에게도 엄격했던 그 나라의 법은 한국인의 밥상엔 참 가혹한 일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겹살을 먹지 못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아빠 회사에서 가족이 나와있는 가족은 우리 집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항상 명절에는 모든 직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 떡국 한 그릇, 김치와 갈비찜, 잡채를 배 터지게 먹고 가는 날이었다. 그럼 그날은 엄마의 비밀 무기가 나오는 날이기도 했다. 먼 사막나라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외로이 지내는 아저씨들에게 엄마는 따뜻한 집밥 그 이상의 것을 선물하였다.


우리 집 부엌엔 항상 커다란 파란색 쓰레기통이 있었다. Sesame Street에서나 나올 법한,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큼직한 파란 쓰레기통. 그 파란 쓰레기통에 엄마는 포도와 설탕, 이스트를 섞어 포도주를 담그시곤 했다. 어려서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엄마는 한 번씩 그 통 한가득 채워 무거운 짐들로 뚜껑을 눌러두었다. 그러곤 한참을 뒀다 명절 때면 그 뚜껑을 열어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그 포도주는 그냥 말 그대로 포도로 만든 술이었다. 그 통이 열리는 날은, 그 통이 비는 날이고, 밤이 길어지는 날이었다. 나는 그런 날엔 엄마의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들을 상마다 나르기 바빴고, 부엌 안에서 엄마는 마술사처럼 요리를 했다. 특히 그런 날이면 냉동고 깊이 있던 삼겹살을 꺼내 김치찌개를 끓여 상에 내셨는데, 모두들 고개를 파묻고 떠나온 집 생각을 하며 접시를 싹싹 비웠다.

한국에 출장 다녀오는 아저씨들이 소고기 사이에 한 줄씩 끼워 넣어 몰래 가지고 오는 삼겹살은 항상 우리 집 냉동실 안에 있었다. 당시에는 짐가방에 고기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음식들을 들고 다닐 수 있었는데, 한국에 출장을 갈 때면 아저씨들이 소고기를 몇 근 사서 그 사이사이에 삼겹살을 한 줄씩 끼워 넣어 몰래 가져오시곤 했다. 그 삼겹살은 우리 집으로 항상 배달되었고, 엄마는 그걸 모아두었다가 직접 담근 김치에 보글보글 끓여 삼겹살 김치찌개를 끓였다. 의리 있는 우리 엄마는 그 삼겹살을 우리 가족만 먹는 식탁엔 올리지 않으셨다. 그래서 파란 통이 비워지는 날, 삼겹살이 풀리는 날은 우리 집에 오는 모든 이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에게도 특별한 날이었다. 삼겹살 김치찌개와 포도주로 행복한 특별한 밥상은 그날 하루만큼은 금기에서 벗어나 따뜻함으로 가득 배를 채워줄 모두의 엄마의 밥상이었다. 엄마의 부엌은 모두가 금기에서 벗어나 음식 안에서 각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채우는 날이었다.

그날 금기를 깨는 건 삼겹살김치찌개와 포도주만이 아니었다.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 아래 수납장 문이 열리고, 가라오케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저씨들이 순서대로 그리움에 사무친 가요들을 부르고 나면, 이내 홍일점 엄마에게 모두가 노래를 청했다. 그날은 단연 엄마가 스타였다. 삼겹살 김치찌개를 끓인 셰프이자, 포도주를 담근 주인공이니, 거의 슈퍼스타나 다름없었다. 엄마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나 해바라기의 노래를 주로 불렀고, 가끔은 노사연의 <만남>을 부르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난 엄마가 그렇게 노래 부르는 모습이 썩 좋진 않았던 것 같다. 눈을 감고 노래에 심취해 부르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쿠웨이트에서 한국에 온 건 88 올림픽 때였다. 호돌이로 온 서울이 가득하던 어느 여름날, 건조한 사막나라와는 다른 습하고 더운 공기를 마시며 한국에 돌아왔고, 더 이상은 돼지고기도 금기가 아니었고, 혼자서도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안전한 자유를 얻었다. 학교에 도시락으로 김만 싸가도 외국 친구들이 'black paper'라고 하던 80년대 국제학교는 지금 한류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시점의 국제학교와는 달랐다. 아침에 엄마가 곰국을 줄 때면 학교 가서 냄새날까 봐 파를 빼고 먹었고, 김치도 입에 댈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아침으로 마늘을 먹어도, 점심 도시락으로 그 어떤 반찬을 싸가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우리 엄마 도시락 반찬은 항상 인기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삼겹살 김치찌개를 가져간 날은 모두가 반찬통 앞에 모여들었다. 그 사실은 알고 나서 엄마는 김치찌개를 싸주는 날이면 더 꽉꽉 눌러 가득 담아주셨고, 그 덕분에 맨 위에 놓인 삼겹살엔 보온 반찬통 뚜껑에 볼록 튀어나온 가운데 부분 때문에 동그란 자국이 그대로 도장처럼 찍혀있곤 했다.


엄마는 67살에 돌아가셨다. 내 나이 37살. 엄마가 돌아가신 날부터 난 엄마의 부엌에 들어갔다. 내가 일하러 가고 공부하러 갈 때면 엄마 대신 차려주던 나의 딸들을 위한 할머니 밥상도, 사위밥상도, 그리고 아빠의 밥상도 모두 내가 차렸다. 내가 끓이는 김치찌개는 엄마를 닮았다. 삼겹살을 넣고 진하게 푹푹 끓여낸 김치찌개는 엄마가 끓여주던 국물 그대로 내 배를 채우는 기억이다. 언제부턴가 내가 한 밥은 오빠에겐 본가의 밥상이 되었고, 아빠에겐 조금 다른 의미의 '집사람'의 집밥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오빠가 집에 오는 날엔 꼭 김치찌개를 끓인다. 내가 한 다른 어떤 음식보다 김치찌개는 엄마의 것을 더 닮아있다. 그래서 내겐 더 특별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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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김치찌개.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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