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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독가의 서재 Jun 08. 2023

비건주부, 생일케이크 거부권

아 오해는 금물, 선물은 받습니다.

“하지 마 진짜! 내가 얘기했잖아!

언니랑 같이 안 한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왜 맨날 내 말은 안 듣는데?

내가 언니랑 생일 하기 싫다고 엄마랑 아빠한테 얘기했잖아!
작년에도 그랬잖아, 재작년에도! “



내가 애정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덕선이가 오열하며 폭발하는 장면의 대사다. 사연인 즉 언니인 보라와 생일차이가 3일밖에 나지 않아 늘 언니 생일날 케이크 하나로 초만 바꿔 생일파티를 해왔던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볼 때는 당시 둘째의 설움을 제대로 보여준 장면이라며 감정이입이 되어 덕선이를 응원했었다. 하지만 최근 이 장면을 우연찮게 보다 “생일케이크가 문제네. 그러게 왜 생일날 생일 케이크가 필수인 세상이 된 거야?”라는 내 말에 남편이 피식 헛웃음을 던진다.




나는 작년부터 내 생일에는 케이크를 사지 않는다. 비건지향을 한 첫 해는 비건케이크를 사서 생일날을 축하했다. 조각 케이크로 먹을 때는 맛있던 케이크도 며칠을 두고 여러 차례 먹다 보니 맛이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왜 생일날 케이크를 사서 초를 불어야 생일을 축하하는 게 된 거지?라는 의문으로 넘어간 것이다. 생일 하면 케이크와 초를 부는 장면은 마치 누르면 바로 튀어나오는 주입식 학습처럼 당연한 것이라 한 번도 의문조차 갖지 않았다.      


거기다  케이크만큼 쓰레기가 많이 배출되는 항목도 없다. 우선은 케이크 박스, 축하 초, 플라스틱 칼까지 딸려온다. 물론 케이크 박스, 칼, 초 모두 잘 두고 여러 번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는 일이 횟수 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보니 보관하고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렇다고 케이크를 적당히 담을 용기도 애매해 제로웨이스트 라이프에 그다지 훌륭한 품목이 아닌 것이다.


대체품을 찾기보다는 당연하다 했던 것에  질문을 던져보니 답이 나왔다. 그래서 작년 생일부터 내 생일에는 케이크를 사길 거부했다.


처음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축하하는 건데 그래도 너무 기분이 나지 않는다면서 계속 사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거듭 묻고 확인했다. 나는 정말 케이크를 먹아야 한다면 내가 먹고 싶을 때 그때 먹고 싶고,  케이크가 정말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필요한 것이라면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내 생일 내가 없고 케이크가 있어야 축하하는 기분이 난다니 이거야 말로 주객전도가 아닌가. 내 생일만큼은 상업성 케이크로 축하의 자리를 채워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 생일날은 비건 식당으로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하고 케이크 없이 생일축하를 받았다. 여전히 몇 번의 재확인 과정은 있었지만 작년보다 남편과 아이들의 반응은 당황보다는 그럴 수 있음으로 변해 있었다. 내 생일을 지나고 나서 남편도 내년 자기 생일에는 케이크를 사서 축하하는 것보다 가족들이 같이 롤링 페이퍼처럼 쓰고 싶은 말을 쓰며 서로 축하하는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고 했다. 아니 이 남자, 생일날에는 무조건 **제과 ****** 케이크 1호를 사달라고 하던 그 남자 맞나?


흔한 말이지만 태어날 때 두 손 꼭 쥐고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는데 지금 나는 지금 충분히 풍족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제 생일날 하루 만이라도 조금 덜하게 살고 싶다. 이러다 내년 생일에는 금식을 하겠다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이거 참 퍽 난감하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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