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나는 인생에서 또 한 번 큰 일을 실행했다. 대학시절 갈망했으나 현실이 녹록지 못해 늘 '언젠가는'이라는 읊조림으로 달래었던 그곳, 영국! 어엿한 직장인이 된 나는 구정연휴기간에 몇일의 휴가를 붙여 내고 일주일간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런던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숙박지 가까운 역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출발 3일 전 갑자기 가야겠다는 생각에 여행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일단 유럽여행의 시작 혹은 끝이 영국이니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보자라는 생각에 예약한 한인 숙박업소였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많은 한국학생들이 숙박지에서 늦은 저녁을 챙겨 먹으며 여행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짐을 내려놓고 내일 동선을 짜기 위해 숙박 매니저와 여행객들 사이에 동화되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 머릿속 동선들을 질문하며 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기간이 짧은 편이라 런던 근교위주로만 다닐 예정이라는 나에게 많은 이들이 여기 가라 저기 가라 런던 시내는 날짜가 맞으면 같이 가자 하며 일주일간의 스케줄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쪽 끝자리 묘한 포스를 내며 주근깨 가득했지만 생기가 넘쳤던 언니 한 분이
“셰익스피어 좋아하면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을 다녀와봐”
라는 묵직한 한방을 날렸다. 알고 보니 이 언니 유럽출장을 왔다 유럽에 매력을 느껴 회사를 휴직하고 1년간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내일이 한국으로 들어가는 즉 오늘이 마지막 여행날이라는 것이다. 사하라사막까지 다녀왔다는 그녀의 말에 재빨리 나는 머릿속에서 일정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아침 일찍 나는 스트랫퍼트 어폰 에이븐을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일정 중에서도 가장 멀리 이동하는 곳이었다. 런던을 벗어나자 초록색 가득 자연만 보이고 거기가 거기 같다 라며 지루해 잠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 눈을 뜨니 버스가 마을 입구를 들어가는 중이었다. 순간 나는 어린 시절 언니를 따라 보던 주말명화 속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중세로 시간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지는 에이븐 강과 그 강의의 백조가 주는 아름다움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다. ‘이런 마을에 살면서 글이 안 써지기도 힘들겠다.’라는 생각만큼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이 난다. 버스에서 내려 나는 관광정보센터에 방문해 지도와 설명을 듣고(지금도 불가사의하다. 내가 과연 알아들은 것인가?) 마을지도 한 장을 얻어 차례차례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신기해 지나가는 사람마저도 눈에 담고 가겠다고 힘을 퐉주며 쳐다봤다. 동네가 크지 않고 관광객들이 보는 범위가 비슷해서 현지인과 관광객은 금방 눈에 띄게 구분이 되었다. 그리고 유독 검은 머리 청년과 길에서 자주 마주쳤다. 나처럼 혼자였다. 셰익스피어 생가에서 마주치고 뉴플레이스에서도 마주쳤다.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을 갔으나 문이 닫혀 있어 아쉬워하며 돌아오는 길에 그 청년은 나와 반대로 오고 있었다. 문이 닫혀있다고 말을 해줘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 그 청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두근
그리고 뭐라고?
중국말인 듯했다. 당황한 나는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닌 눈빛만 발사하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청년과는 다시 멀어졌다. 이 마을은 전체적으로 16~7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이런 작은 우연도 설렘으로 다가왔다. 마을자체가 전통가옥이 많고 거기다 내가 방문한 셰익스피어 생가 등은 특히 정원마저도 그 세기의 유행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작은 것 하나 그냥 흘러버릴 수 없게 나를 계속 붙잡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셰익스피어의 무덤이 있는 홀리트리니티 교회를 구경하고 나오니 해가 이미 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기도 이미 늦은 상황. 다음날 아침 버스시간을 확인하고 숙박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관광정보센터에 방문하는 길에 다시 그 청년을 만났다. 어색하게 우리는 웃었고 이번에는 영어로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일단 시간과 식당 명을 알려주어 그 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관광정보센터로 들어가 숙박문의를 했고 내가 첫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동선을 고려해 현지인이 운영하는 예쁜 B&B을 추천받아 부랴부랴 찾아갔다. 2층의 아담한 주택이었다.
친절한 영국부인은 몇 가지 방 사용에 대한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고 저녁식사를 먹지 않은 나를 위해 식당을 몇 군데 추천해 주었다. 영국부인이 방에서 나가자 나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잠깐 잠이 들고 다시 일어나면서 나는 저녁식사 약속을 완전히 잊어먹었다. 배가 고파 영국부인이 알려준 식당을 찾아가 혼자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와 침대로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새벽 나는 해도 뜨기 전 이동하면서 그 어슴푸린한 동네의 윤관만 보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한 달 만 살아도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걸 실천했으면 지금 유행하는 한 달 살기의 시초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나는 부랴부랴 히드로 공항으로 갔고 한국발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그 청년과의 저녁식사 약속이 거짓말처럼 생각났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셰익스피어 하면 그 마을 초입에 들어섰던 그 풍경 호수 위 백조들이 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청년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와의 저녁식사가 이어졌다면 어떤 인연이 이어졌을까? 하는 약간의 궁금함이 남겨진다. 어찌 되었든 내 여행추억 한 조각에 남는 그림처럼 나 역시 그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여행의 추억조각 하나쯤은 되고 있을까 하는 의미 없는 기대를 가져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