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되뇌지 않고 감정에만 오롯이 머물다
내 속으로 침잠하여
감정과 머물러야 할 때가 있다
생각을 곱씹지 않기 위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감정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헤아리고 쓰다듬는다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생각의 파편을 곱씹고 또 곱씹습니다. 생각의 파편은 점차 나를 잠식해 나갑니다. 이내 부정적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부정적 생각과 감정의 흐름에 휩쓸립니다. 결국 자기비판(self criticism)에 이르게 되죠.
부정적 생각과 감정의 굴레는 쉽사리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과거 부정적 경험이 많을수록 (자기 자신에 관해서든 아니면 부정적 환경에 노출되었는지 간에) 그 굴레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우울감/불안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더 어렵습니다. 몸이 이미 부정적 경험에 대한 일종의 무조건적 반응(unconditional reflex)으로 형성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정적 생각과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 뇌의 메커니즘은 “하지 마”라는 명령이 주어지면 더 하고 싶어 합니다. 북극곰 실험이 이를 증명합니다. 두 실험 그룹이 있고요. 한 그룹은 북극곰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생각해 보라고 지시받았고요. 다른 그룹은 최대한 북극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를 받습니다. 어떤 그룹이 더 자주 북극곰이 생각났을까요? 맞습니다. 두 번째 그룹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 생각과 감정의 굴레를 멈추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더 생각이 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명상(mindfulness)입니다. 사실 명상은 동양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지만 명상의 체계화 및 임상에서 구체적 사용 도구로 널리 존 카밧진 덕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명상이라는 단어가 모호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명상(冥想)은 글자 그대로 ‘어두운 곳에서 생각하다’이니 눈을 감고 생각하는 동작을 나타내니까요. 오히려 mindfulness 가 명상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마음 챙김이라고 번역했던데 그것 역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 것 같아요.) 알아차림입니다.
순간을 알아차립니다. 생각/감정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오감으로 알아차립니다. 내가 지금 보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창문, 테이블, 의자, 소파, 사람들. 내가 듣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냉장고 동작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내게 들리는 주변 소리를 모두 알이 차립니다. 냄새를 맡아봅니다. 그리고 그 냄새를 알아차립니다. 무엇을 먹고 있다면 맛을 알아차립니다. 맛을 음미하면서 음식물의 감촉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내 피부에 와닿는 감촉을 알아차립니다. 면 티의 감촉, 블라우스의 감촉, 얼굴에 와닿는 공기의 차가움, 시원함을 알아차립니다. 생각을 이어가지 않습니다. 오감으로 감지한 정보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이내 생각과 감정에 골몰해 있던 내가 아닌 외부세계에 노출된 외부세계를 감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생각과 감정의 굴레에서 빠져나옵니다.
생각과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감정에 휩싸여 휘둘리는 게 아니라 감정과 거리를 두고 감정을 쓰다듬고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