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지만 뿌리부터 단단한 그 느낌 말이야
아침. 남편이 샤워하고 나온 욕실에 들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어제보다 많은 것 같아 마음이 가라앉는다. 얇고 가늘기로 유명한 내 머리카락의 안위만 궁금하다가 이제는 남편의 머리카락까지 눈에 밟힌다. 그의 머리칼은 튼튼했고 그래서 탈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풍성함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비듬이라던지 가려움이라던지 그런 게 걱정이었지 머리카락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꽤 많은 머리칼이 빠지기 시작했다. 배우자의 나이 듦도 눈에 밟히는 요즘. 그래서인지 나이보다 더 늙은 기분이 든다.
밤. 두 돌이 된 아이의 머리를 감긴다. 어제 없던 머리카락이 새롭게 생긴 것 같다. 아주 얇고 훅 불면 금세 날아갈 것 같지만 나는 안다. 새로 태어나는 머리카락은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하다는 걸. 아이들의 머리는 매일 감겨도 웬만해선 잘 빠지지 않는다. 강력 접착제로 붙은 걸까 싶을 만큼. 얇지만 뿌리부터 단단하게 태어났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래서 감동이다. 생명력이라는 단어 그 보다 더 근사한 단어는 없다. 경이로움 그 자체다.
"아들이죠?"
첫 아이를 키울 때의 일이다. 유독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지 않아서 그랬는지 사람들은 다들 아들이냐고 물었다. 딸이었는데. 이제나 저제나 언제 길게 자라서 묶고 땋고 할까 궁금하던 시기는 또 금방 지났다. 다섯 살이던가 여섯 살이던가 머리카락은 기다렸다는 듯이 쭉쭉 길어졌다. 몹시 풍성해졌다. 내가 낳은 딸이 맞나 싶을 만큼 머리칼이 건강했다. 나의 엄마는 말했다. "너도 저만할 때는 풍성했어."
머리가 길게 자라 예쁘게 묶은 아이와 함께 쿠키 같은 걸 먹던 중이었다. 어깨춤에 머리카락 한 올이 길게 빠져나와있어서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건 필시 빠진 머리카락이라는 증거였다. 나는 내 머리카락처럼 힘없이 툭 딸려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디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줄 알고 좀 더 강하게 힘을 주어도 꼼짝없이 어딘가에 매달려있었다. "아야, 아파 엄마." 나는 그제야 빠진 머리카락이 아니라 붙어있는 머리카락임을 인지했다. "아, 엄마가 미안해." 아, 다시 생각해 봐도 그건 '방금 전 빠진 머리카락'의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때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마음이 콩닥거렸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 집 거실이고 안방이고 욕실이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다 내 것이었다. 딸의 지분도 꽤 있는 줄 알았는데 한편으로 씁쓸했고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새로 태어난 머리카락에 대하여.
아기의 머리카락. 얼마 전에 태어난 머리카락.
우리 집에서 가장 힘이 센 머리카락이다.
새로운 두피에 새로운 모근 새로운 머리카락
그것이 너무 생경하고 또 너무 감동스러워서
아이의 머리를 감기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